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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광개토왕의 잘못된 만남

2020년 4월호(12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5. 3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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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의 역사칼럼 18] 

 

이성계와 광개토왕의
‘잘못된 만남’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을 ‘묘청의 난’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일천년래 일대사건’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을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묘청의 ‘자주’와 김부식의 ‘사대’가 충돌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묘청은 도읍을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옮기고, 왕을 황제로 칭하며 연호를 사용하자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내세우며,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김부식은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事大)의 논리로 맞섰습니다. 묘청이 결국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토벌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어 난을 진압합니다. 신채호 선생은 그때 이후,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사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나라까지 망하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만약 묘청의 난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자주의 역사를 이어갔을 것이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았을 거라며 말입니다.

 

태조 이성계

 고려 말 1388년,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떠났던 이성계의 군대는 위화도에서 발길을 돌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처음부터 요동정벌을 반대했습니다.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반대하며 제시한 4가지 이유 ‘4불가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불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
2불가, 여름에 군대를 일으킬 수 없다.
3불가, 남쪽의 왜가 그 틈을 노릴 수 있다.
4불가, 여름비에 활과 화살이 물러지고 질병과 전염병이 돌 수 있다.


 2,3,4불가가 이유라면 우리도 문제지만 상대방도 문제가 됩니다. 문제는 1불가입니다. 큰 나라를 섬겨야한다는 ‘사대’의 틀에 갇히게 되면, 그 다음의 논의를 진전시키기가 어렵게 됩니다. 당에 사대했고, 송에 사대했고, 원에 사대했으니, 명에도 사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원을 섬기기 이전에, 몽골의 침략에 맞서 수십 년 동안을 저항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몽골에 항복할 때도 얻을 것을 챙겼습니다. 원의 세조는, 당태종도 멸망시키지 못한 고려가 드디어 항복했다고 하여, 고려의 옛 풍속을 그대로 잇게 하고 부마국으로 국체를 유지해 주었습니다. 그 이전 거란과의 관계에서도, 서희는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역이용하여 우리의 옛 땅 강동 6주를 되찾기도 하였습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후, 명나라는 고려와 뒤를 이어 건국된 조선을 일방적으로 무시했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고려도 멸망시킬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지요. 원나라가 중국 당 태종에 굴복하지 않았던 고구려의 후예 고려를 우호적인 파트너로 여겼다면, 명나라는 중국의 한나라와 당나라에 멸망 당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를 무시하듯 대하였습니다. 적어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한때나마 요동을 정벌했더라면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태도와 이후 조선에 대한 태도는 달랐을 것입니다. 


 위화도 회군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우리가 대대로 사대를 해왔음을 강조했던 반면,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요동이 원래 우리 땅이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압록강 너머 요동이란 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전 이미 이곳을 점령한 적도 있었습니다. 요동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광개토대왕 표준 영정

 이성계와 4대의 조상 및 태종 등 육룡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바로 용비어천가입니다. 용비어천가에는 이성계가 압록강 너머 여러 지역을 휘젓고 다닐 때의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그곳에는 고구려 때 세운 여러 무덤들과 비석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장군총이나 광개토왕릉비로 여기지는 곳도 말을 타고 달렸던 곳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용비어천가에는 이곳에 거대한 무덤과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았을 때 중국 황제의 능과 비석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능과 비석이 너무 커서 감히 고구려가 만든 능이라고, 고구려가 세운 비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성계가 광개토왕릉비를 지나칠 때 말에서 내려 비석에 낀 이끼를 들춰냈다면, 이 비가 광개토왕릉비라는 것을 알았다면, 비석에 광개토왕이 요동을 정벌했다는 글씨를 읽어냈다면 어땠을까요? 요동이 정말 우리 땅이었음을 역사의 현장에서 확인했다면, 이성계는 과연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을까요? 


 그러나 이성계는 능비의 이끼를 들춰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500년이 지나 한 일본군 장교가 광개토왕릉비의 이끼를 들춰냈습니다. 비석에는 ‘왜가 391년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점령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일제는 옛날 자기 땅이었던 백제와 신라 곧 지금의 조선을 다시 차지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습니다. 4불가론에서 주장했듯 요동을 정벌할 때, 남쪽의 왜가 쳐들어 온 게 아닙니다. 요동이 우리 땅임을 몰랐고, 요동의 광개토왕릉비가 우리 비석임을 망각하고 있을 때 남쪽의 일제가 쳐들어왔습니다.


 만약 이성계가 광개토왕을 그곳에서 만났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도 우리는 우리 것을 바로 옆에 두고도 몰라본 채, 사대의 틀에 갇혀 남의 것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나라이름역사연구소 소장 

naraname2014@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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