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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검무’ 예능 보유자 임영순을 만나다

2020년 6월호(12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8. 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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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평양검무’ 예능 보유자 임영순을 만나다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평양검무 예능보유자 
세종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무용학 박사 
한세대학교 한국무용 주임교수
도연 임영순 무용단 예술감독
(사)한국 전통춤연합회 이사장
(사)우리춤협회 이사
(사)한국문화콘텐츠학회 이사
(사)체육철학회 이사

 

 (사)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평양검무 예능보유자로 한세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가르치고 계신 임영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자에게 ‘춘행무’를 열심히 가르치고 계셨죠. 보통 예능 보유자라하면 연세가 지긋하실 것 같은데, 웬걸, 웃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마치 순수한 소녀 같았습니다. 하지만, 춤에 대해 말씀하실 땐 단호함을 보이셨죠. 이봉애 선생님의 뒤를 잇는 평양검무의 보존과 전승이 현재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직접 임영순 선생님의 삶을 통해 알아볼까요? 

 어렸을 때부터 차고 넘치는 끼, 서로 차지하려던 선생님들 
 저는 충남 서산이 고향입니다. 어머니는 46세에 저를 낳으셨죠. 1남 6녀 중 막내입니다. 어렸을 때 엄청 재간둥이었습니다. 노래, 춤, 동극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난 소질을 갖고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학교행사, 동네잔치, 온갖 경연대회를 휩쓸었습니다.
 학교 행사나 경연 대회가 있으면 방과 후 시간에도 연습을 다 못해 밤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를 다섯째 언니가 챙겨주느라 고생이 많았죠. 초등학교 때는 학교 행사 준비로 인해 저와 같이 해야 하는 무용선생님, 음악선생님, 동극선생님들 간의 웃지 못 할 언쟁이 잦았습니다. 바로 연습시간 조율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렇게 예능에 재능이 있어도 지금처럼 진로를 지원해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던 시골 환경이었습니다. 집안에 일하는 사람까지 둔 제법 넉넉한 살림이었지만, 엄격했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렇게 어릴 적 끼 많던 재능은 한동안 묻히고 말았습니다.

 독립선언
 결혼 후, 둘째가 대학 입학을 하면, 그때부터 내 인생을 살겠다 결심했었고 그 계획을 실천하고자 정말 주부, 엄마, 아내의 역할에 한 치의 오점도 없이 완벽하고 빈틈없이 수행했습니다.(웃음) 단 한 번의 큰소리를 낸 적도 없었지요. 가족들의 양말, 속옷까지 다려서 항상 새것처럼 준비해줬습니다. 드디어 둘째아이 대학 입학 후, 저는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아내, 엄마, 주부로서의 역할에 소홀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족 모두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내 삶에 더 충실하겠다”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건강을 위해 승마를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흔히 하는 운동은 하기 싫었거든요. 무엇보다 한국무용을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에 지원해서 한국무용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평양검무예능보유자’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저의 독립선언은 지금까지 제가 했던 일 중 제일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봉애 선생과의 첫 만남 
 저와 친분이 있었던 <춤>이라는 잡지사 기자와의 만남으로 ‘이봉애’선생님과의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숨어있는 춤꾼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글을 쓴다며 이봉애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동행하게 되었죠. 관악역 바로 앞 허름한 싸리문 집 앞에 도착해 처음 뵌 선생님의 모습은 당당하고 목소리는 낭랑하셨지만, 다리가 불편해 보였습니다. 몇 마리의 강아지와 작고 아담한 방안의 분위기에 불편하신 다리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이봉애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평양검무 전수조교 되던 해
 <평양검무보존회>는 1985년에 창단 후 전수를 시작하였고, 안양시의 지원을 받아 1992년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공로상, 장려상, 은상, 금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등의 수상에 이어 대통령상 수상을 꿈꾸며 오늘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2001년에 평안남도 문화재로 등록하여 2002년 2명의 이수자를 배출했습니다. 그 후, 2004년 8명, 2005년 17명, 2014년 14명, 2016년 17명… 올해 2020년에는 무려 31명의 이수자를 배출하였지요. 전통춤을 기피하고 현대적 댄스나 힙합, 방탄소년단 춤 등만 선호하는 현 시대 흐름 속에 이런 이수자의 증가세는 평양검무가 그만큼 매력 있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입니다. 또한 평양검무를 격상시키고 춤의 우월성, 전통성, 예술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정성을 다해 전수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용계에선 요즘 말로 대박이라고 하죠. 이렇게 평양검무는 한 발 한 발 대한민국을 대표할 춤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열정을 다해 오직 한 길로 이봉애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의 춤, 인품, 숨소리까지 섬세하게 배우고 익히며 선생님과 똑같이 전수시킨 노력으로 저는 2014년에 ‘전수조교’가 되었습니다. 전수조교는 단순히 춤만 잘 춘다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저! 해주십시오.”라고 해서 얻어지는 직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전수조교로 인정해주신 점은 오롯이 한 길 위에서 마중물 같은 모습으로 전수 시키는 저의 노력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데 힘이 되어주는 근원, 남모르는 노력, 자신의 명예보다 내일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자세 속에서 마중물 한 바가지 물의 의미를 아는 마음을 보신 것이죠. 그것이 바로 평양검무를 보존하고 전승할 힘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스승님이 저를 인정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2005년부터 <평양검무보존회>의 사무행정 처리 뿐 아니라 모든 일을 도맡아 성실히 수행한 공적도 인정을 받았던 것 같아요. 더욱 감사한 것은 선배 이수자 선생님들도 저를 모두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지금도 모두에게 감사드려요. 이렇게 전수조교가 되고, 평양검무예능보유자 직분까지 올라왔으니까요.

 평양검무란
 18세기 평양 권번에서 처음 선보였던 평양검무는 조선시대에 궁중으로 선상되어 궁중 연회에서 추어지게 되었으며 왕권 몰락 후에는 평양에서만 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기녀들에게 있어 이 춤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기본무로 평양의 예기(藝妓)들은 모두 추었을 만큼 귀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춤입니다. 무엇보다 평양검무는 고구려 무사의 용맹스러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평양감사가 이 평양검무를 꼭 추게 했다고 해요. 왜냐하면, 평양검무는 도발적이고, 대담하고, 동적이면서 활달하고, 용맹스러움이 보이는 춤동작들로, 중국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위협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전통 말살 정책을 펼치는 북한에서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죠. 다행히 평양검무 1대 보유자 이봉애 선생님이 평양 권번에서 배웠던 평양검무를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안양, 석수동에 정착해 제자들에게 전승하므로 명맥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 춤은 남북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춤입니다. 소중한 문화적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춤에 담겨진 정신과 맥은 우리 역사를 입증해주는 동시에, 그 시대 우리 민족의 얼과 흥을 담고 있는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평양검무가 남북관계에 문화적으로 기여할 뿐만 아니라,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할 중요한 외교적 자산가치가 있는 춤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평양검무와 남한검무와의 차이 
 우리나라 문화재로 등록된 검무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평양검무, 경기검무, 진주검무, 통영검무죠. 각각이 가진 특징이 있는데, 평양검무는 두 명이 마주 보고 추는 쌍대 춤으로, 남성적인 색채가 비교적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검무에 비해 교태미는 많지 않지만, 고구려의 기상을 물려받아 굉장히 활달하고 동적인 춤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양검무를 ‘중성적인 춤’이라고 이야기하죠. 또한, 칼끝으로 바닥을 콕콕 찌르는 춤사위나 늘 한 쪽 방향으로만 도는 점 등은 다른 검무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평양검무 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동작 하나하나에 화합하며 남을 섬세히 배려하는 마음, 사랑이 가득한 마음, 여성의 섬세함과 다정함 등의 마음이 표현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춤사위의 표현이 어렵습니다. 남한 지역의 검무인 경기, 진주, 통영검무는 여성적인 교태미를 강조해 머리나 도구, 장식이 화려합니다. 전립(무관이 쓰는 모자)도 약간 비스듬하게 쓰고요. 하지만 평양검무 의상은 심플하고 전립도 바르게 쓰는 게 특징입니다.

 평양검무, 현대와의 접목
 검무는 어렵고 생소하고 특별한 사람들만 추는 전통춤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무 또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춤이 되었으면 합니다. 평양검무의 원형은 지키되, 그 틀 안에서 맥이 이어지도록 안무를 구성하고, 사람들에게 이 춤 맛을 느끼도록 하고 싶은 게 저의 꿈이자 <평양검무보존회>의 숙원사업입니다. 그래서 저는 군포시 지역 춤으로서 활달하고, 동적이고, 밝고, 경쾌한 동작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시민검무를 창작해 볼 계획입니다.  

 평양검무 ‘보존’과 ‘전승’의 어려움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선 필요한 재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평양검무는 북한에서 전승되어져 내려온 평안남도의 무형문화재이기에 소속된 지역이 없습니다. 지원받을 도의 재원이 없으니 어려움이 많죠. 요즘은 ‘메세나 기업’이라고 해서 문화예술계에 지원 사업을 해주는 기업들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방법을 잘 몰라 지원을 못해봤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가나 지역 기업에 도움을 청하려고만 하지 말고, 평양검무 전공자들의 인프라를 잘 형성해 환경적인 여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점이 잘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전승할 장소, 경비 등 환경적 지원은 아예 없는 이북 5도 문화재에 대한 처우개선은 국가정책으로 시정해야 할 필요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속된 지역이 없으면 국가에서 보호하고 육성하여 보존, 전승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마땅합니다. 남북교류, 평화통일은 앞당기고자 노력은 많이 하는데 역사를 갖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내팽개치는 점은 현실과의 일치성이 결여 되었다고 봅니다. 예능보유자 타이틀만 있을 뿐이지, 스스로 자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의 이북5도 문화재들의 현실에 많이 안타깝고 홀대받는 것 같아 참 속상합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여건이 허락지 않는다면 보유자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서라도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길 바라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이북5도 문화재에 대한 가치는 빛나고 높아질 것이며 긍지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은 공연
 이봉애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는데, 급격히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휠체어를 타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잠시 서서 동작 하나를 보여 주실 뿐, 연이어 춤을 출 수가 없으셨죠. 하지만 장구를 치며(정말 장구를 잘 치셨어요) 가르치실 때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무섭게 가르치셨습니다. 2005년 처음 공연을 기획하며 휠체어를 타신 선생님을 무대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의 공연입니다. 휠체어에 앉아 검무 동작 중, 칼 돌리는 동작만 안무를 구성해 1분여 공연을 하셨는데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시며 공연에 임하셨고, 관객, 제자 모두 울음을 삼키며 숭고한 마음으로 감동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역사회와의 연계
 현재 한세대의 배려로 평생교육원에서 평양검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군포시에서 8~9년 활동했고, 무엇보다 저를 가르친 이봉애 선생님이 작년 12월 2일 97세로 군포에 있는 ‘엘림노인전문요양원’에서 4년 정도 요양하시다 돌아가셨어요.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배려해주신 군포시에 고마운 마음이 새삼 솟아나며 선생님도 기리고, 쉽게 볼 수 없는 문화재인 평양검무를 군포시민들과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깊이갖게 되었습니다. 전통과 역사를 공유하고 연구하면서 전통문화예술을 지키고 공연과 봉사 및 지역에도 공헌하고자 합니다. 평양검무를 배우고 싶다면 한세대 평생교육원으로 오세요.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폭 넓은 소양과 전문성도 키우고 함께 공연과 봉사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제자들에게 바라기는
 먼저 제가 선생님께 배운 그대로를 ‘올곧게’ 전승하기 위해 항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평양검무 춤사위 한 동작 한 동작에 담긴 정신들을 ‘오롯이’ 전수하고 그 정신 속에 담겨진 의미를 몸으로 익히며 인품까지 가르치고자 합니다.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인격 수양도 해야 한다고 늘 가르침을 주신 저의 이봉애 선생님은 무용수들은 예쁜 옷을 입고 매번 무대에 서기 때문에 자칫 자기가 최고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고 난 후 주신 지침은 “리더는 지위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디어나 가능성을 알아보고 제자에게 기회를 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다”라고도 하셨죠. 무엇보다 이봉애 선생님으로부터 구전으로 받은 평양살풀이와 평양선비춤, 쌍검대무, 손북춤은 제가 복원하고 재 안무해서 탄생시킨 춤입니다. 복원된 이 춤들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소중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전수하고자 합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가르치는 선생이 제자를 섬겨야 합니다. 보유자라는 자리가 대우만 받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거죠. 어찌됐든 저의 바람은 ‘청출어람’이라는 말처럼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앞으로의 바람
 첫 번째로 춤은 산수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면, 한 선생님으로부터 배워 동작과 순서는 같을지라도 멋과 호흡, 춤추는 모습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래서 춤을 자기화하여 익히도록 가르칩니다. 물론 이렇다고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평양검무는 문화재 춤으로써 세계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춤이므로 ‘올곧게’ 전승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전승 교본과 영상 등의 자료들을 남기는 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의 역사이자 문화자산인 평양검무에 대해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춤의 뛰어난 예술성, 전통성, 역사성, 학술성을 알아야 합니다. 춤 안에 담겨져 있는 민족성과 자긍심, 우리만의 잠재되어 있는 흥도 같이 나누며 느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쉽게 배우며 즐길 수 있도록 평양검무를 재 안무해 국민체조처럼 온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통은 오랜 역사와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혜와 미의식을 담고 있으며 선조들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지역 안에서 전통문화유산이 교육과정을 통해 체계적이며 현대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임영순 선생님은 평양검무가 전쟁과 분단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의 굴레 속에서 보존가치가 아주 높은 무형 유산이라는 점과 대한민국의 국민적인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남북통일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전승이 무척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런 점에서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6월호에 평양검무가 실리는 것이 의미가 있다며 활짝 웃으셨죠. 임영순 선생님과 제자들에 의해 평양검무가 올곧게 전승되도록, 도움의 길이 속히 열리기를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임영순 예능보유자
평양검무 영등포 전수관 (02-3667-3054)

calany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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