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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에 놀라다 

2020년 7월호(12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9. 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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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에 놀라다 

 

오늘처럼 세찬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빗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 떠나온 나의 고향집으로 가게 된다. 때는 1960년대로 돌아가 내가 6살 때 기억이다. 우리 아버지는 그때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결혼을 일찍 하셨는데, 혼례식을 올린 후, 나중에 국방의 의무인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사건인즉슨 집안의 가장이 없을 때 일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소백산 중턱 (충북 단양군 대강면 수촌리) ‘미륵이골’(우리는 미리기라고  부름)이라는 해발 700고지 이상의 아주 깊은 산골, 첩첩산중인데, 집들은 화전민 마을처럼 7가구가 옹기종기 소백산 7~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뒤에는 소백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은 안 보여도 깊은 계곡물이 흘러서 배산임수가 따로 없는 명당자리 같았다.  마당에 서면 시야가 확 트여서 호연지기를 기르기 딱 좋은 터이기도 하고 우리 집에서 한 두어 시간 올라가면 소백산 연화봉에도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7가구 중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개울건너 한 가구만 살고 있는 외딴 집,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어머니와 나, 첫째 여동생(3살), 둘째 여동생(0살), 둘째 여동생은 태어난 지 대략 30~50일정도로 기억된다. 그때도 오늘처럼 비가 2~3일 장대비가 오고 한동안 소강상태였다가 추적추적 계속 내려서 지반이 약해진 상태였다. 평소대로 네 식구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산사태가 일어나 토담집 안방 창호문으로 흙더미와 흙탕물, 자갈, 돌덩이가 순식간에 집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잠결에 깜짝 놀란 엄마가 나를 깨우고 첫째 동생과 함께 억수같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내몰았다. 나는 광목으로 만든 속옷만 입고 맨발로 쫓겨나듯이 집 밖으로 나와 뒷동산 평평한 곳에 여름에 수확해서 피라미드처럼 쌓은 보리짚단으로 피신했다. 뒷동산을 오르면서도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연신 “엄마 이게 왜 이래? 이게 왜 이래?” 그랬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보리짚단을 빼라고 하길래 엄마랑 막 잡아 뺐는데…

헉!!
보리짚단 속에 이미 불청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짚단 속에 비를 피해서 뱀 5~6마리가 뒤엉켜서 있는 게 아닌가? “악!!” 나는 기절초풍할 지경에 까까머리가 쭈뼛쭈뼛 다 곤두섰다. 그래도 어머니는 차분하게 지게작대기로 “쉬~~~ 쉬~~~ 저리 가라 저리 가라”하면서 뱀을 쫓아내셨다. 뱀들은 저항하지 않고 스르르 스르르 짚단 밖으로 빠져나갔다. 
엄마는 보리 짚단 속에 첫째 여동생과 나를 놓아두고 다시 집으로 내려가 생후 2개월 된 둘째 여동생을 찾는데. 이미 흙더미에 깔려서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중이었다. 엄마는 2개월도 안된 동생을 낚아채 어깨에 들쳐 메고 간신히 붕괴 직전의 토담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둘째 여동생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때 상황이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까지 장대비가 오면 “흐억 흐억” 숨을 몰아쉬며 비가 그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급박한 상황이 종료되고 보니, 비는 오지만 짚단 속은 아늑했고 산골짜기의 새벽녘이 쌀쌀했지만 가족 전부가 함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견딜만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조금씩 비가 그쳤다. 이른 아침에 저쪽 계곡반대편에서 장서방(이장 겸 훈장)이 우리 집 쪽으로 든든한 밧줄에 돌을 매달아서 던져주었다. 그 밧줄을 커다란 밤나무에 단단히 꽁꽁 동여매라고 일러주신다. 지금처럼 계곡물이 불어나서 야영객 고립 시 구출했던 방법과 똑같다. 먼저 계곡 건너에서 장서방이 밧줄을 타고 우리 쪽으로 건너왔다. 우선 내가 장서방 등에 엎혀서 넘어가고 다음 첫째, 둘째 동생 순서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어떻게 건너게 되었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아침 일찍 누가 연통을 넣었는지(파발마를 보냈는지?) 아랫마을 사시는 큰아버지, 큰어머니, 큰외삼촌, 동네어르신, 일가친척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며칠 후 군대 가신 아버지가 휴가를 오셨다. 그때 우리 집은 거의 반파되어 집을 다시 짓게 되었고 어찌어찌 구호물자가 엄청나게 시골 촌구석으로 오게 된다. 예를 들면 눈깔사탕, 미제 동그란 모양의 탁상시계, 겨울 방한복, 인민군 국방색 군대 털모자가 기억난다. 당시 셋째 큰아버지가 지금 기억으로 제기동역 (구)성동역 자리에서 미군 캬츄사 출신으로 한양에서 먹물깨나 먹었다며 전역 후, 고향에서 꽤 큰소리치고 사셨다고 한다. 그 셋째 큰아버지가 손을 썼는지 어쨌는지 우리 집은 장마수혜자로 지정되어 죽령의 음지마을에 기와지붕 집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전역 후, 물난리에 지치셨는지, 아니면 구호물자를 받으면서 문명을 맛보셨는지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그 기와지붕 집은 내가 8살 되던 해에 서울로 이사 오면서 다 정리하고, 처음 정착지 청량리시장에서 상업에 종사, 생선장수와 ‘단양상회’라는 청과물 도매업에 투자했다가 경험과 경륜이 부족하여‘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사람들한테 사기란 사기는 다 당하고 상업과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빗소리에 놀란 사람은 그 당시 현장에도 없었던 아버지와 아무것도 몰랐던 둘째 동생이 아닌가 싶다. 아무쪼록 자식들 공부 성공시킨(?) 아버지의 평안한 노후를 빌며, 둘째 동생의 비에 대한 두려움이 60년이 다 되어가는 이즈음에 아직까지 남아있는지 오늘은 전화로 안부를 물어야겠다.   

경기도 안양시 박칠봉

pakcb777@daum.net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9>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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