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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영국의 좌파정권인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1945~1951)는 한국파병을 결정하였나?

2020년 7월호(12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9. 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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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

 

어떻게 영국의 좌파정권인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1945~1951)는 
한국파병을 결정하였나?

 

 역사와 관련해서 구약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던 세대가 일어나….’(사사기 3:1-2). 물론 부정적 관점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전쟁의 의미를 알고 기억하고 교훈 받은 세대가 없어져, 조상이 했던 행동의 궁극적 의미는 기억되지 않고, 종교가 쇠퇴하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가 타락하는 3400년 전을 이야기한 겁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화끈하게 승리한 것도, 명백하게 패배한 것도 아닌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새파란 20세 청춘의 나이에 멋모르고 징병 되어, 혹은 자발적으로 막연하게 공산주의를 싫어하고 자유를 선물해주려는 이상으로, 한반도라는 이국땅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싸웠던 16개국의 병사들이 이 전쟁으로 허무감에 빠지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보았던 비참한 당시에 비해서 놀랍도록 발전한 한국,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풍성하게 영위하는 자유와 번영이라는 선물을 주는 일에 자신들이 일조했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확신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반대로 ‘항미원조’를 외치며 북한을 위해서 싸웠던 중공군들에게 남북한의 현실을 관찰하고 동일한 질문으로 취재해본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그런데 최근에 ‘한국전쟁이 북한 때문에 벌어졌는가?’라는 질문에, 20대는 44%, 60~70대는 72%가 Yes라고 답했다는 놀라운 보고가 나왔습니다. 이 보고는 판단할 수 없거나, 남한 혹은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20대가 무려 56%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한과 북한의 모든 면에서의 실질적 삶의 풍요도의 엄청난 차이를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 이후 (구)소련의 극비문서가 해제되면서 북한의 치밀한 계획과 스탈린과 모택동의 철저한 사전모의를 통해 이 전쟁이 계획된 것이 밝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치가 나오는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과거 전교조를 위시한 좌파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역사교육분야에 많이 침투하였고, 자신들의 생각을 집요하게 새로운 세대들에게 주입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남한 좌파들은 역사의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유물론적 역사발전이론이라는 막스적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집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더 무섭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들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주자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망해도 좋다고 여길 정도였던, 과거 우리 선조인 조선인들의 정치적 역사적 DNA를 그대로 가진 사람이라는 점입니다.1) 우파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치명적 DNA가 있을 수 있으나, 이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될 만한 그렇게 매력적이고 실질적인 사상, 제도가 뚜렷하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우를 막론한 정치적 상호투쟁의 판 자체를 뒤엎고 새 판을 깔아야 하는 겁니다. 20대는 명백하게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 즉 ‘전쟁을 몸으로 경험하지 않는 세대라는 매우 불리한 역사적 삶을 사는 사람들인 셈인데, 본인들은 이런 (역사의식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비어있음’을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끝나지 않은 전쟁’ 즉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인 점을 새로운 세대는 알지 못하고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는 저는 경험이 있느냐고요? 어머니 뱃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여 휴전되는 해(1953년)와 조약이 서명되던 그 달(7월)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은 (근로)정신대(소위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아버님은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결혼했다는 사실을 늘 듣고 자랐습니다. 즉 저는 한국전쟁 이전에 소위 일본이 화려하게 쇼를 하며 벌였던 대동아전쟁의 간접적 피해자인 셈입니다. 그리고 영국 유학 중에 마침 제가 살던 곳이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던 Gloucester연대가 있던 지역이었고, 중공군과 교전 중에 포로되어 전쟁 휴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신 분을 만나 뵙고 한국식 큰절을 한 것도 기억납니다. Oxford의 유서 깊은 Oriel College 학장실에서 벌어진 박사학위 논문방어를 시작하자마자, 주 질문자 교수님이 자기 친구가 한국 동란에 참여했다고 먼저 말을 꺼내며 이야기를 했을 때, 저의 가슴과 눈시울이 뜨거워져 논문방어에 잠깐이나마 헷갈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저와 우리 한국이 그만큼 빚진 나라인 영국의 한국동란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하나를 다루면서 새로운 [역사비평]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어떻게 영국의 좌파정권인 노동당의 애틀리 총리(1945~1951)는 한국파병을 결정하였나?

 영국 좌파 노동당 정권의 애틀리 총리는 한국동란이 일어나자마자 즉각 파병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들을 보내었으며 미국에 이어 많은 1,078명의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좌로 많이 경도되어, 심지어 2020년 북한인권에 대한 유엔법안에도 참여하지 않는, 악한 남한 좌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혹시 이렇게도 비난할 수 있겠지요. 영국좌파는 제대로 된 좌파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대로 된 좌파의 사례’를 공산주의 역사가 시작된 지 100년이 넘었는데,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또 자신들은 그런 체제 아래 가서 살라고 하면 갈 사람이 있을까요? 애틀리 총리가 한국전쟁에 영국군을 파병하기로 한 결정에는 매우 깊은 역사적 사연이 놓여있습니다. 

 

1950년 6월 홍콩 주둔 영국 군함과 병력이 출동하고 있다. [사진:영국 국립문서보관소] 


 1. 영국은 2차대전 내내 극단적 전체주의인 나치즘과 싸웠지만, 애틀리 내각은 또 다른 극단적 전체주의인 공산주의라는 더 큰 위험을 분명히 알아차렸습니다. 비록 전임 보수당 수상이었던 처칠이 공산주의를 ‘철의 장막’이란 용어로 사용했을 때, 애틀리는 반대당이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런 표현을 거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영국 전체의 지혜로운 콘센서스(통합의견)로 받아들인 겁니다. 전후 세계에 대한 현재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 전쟁의 승리 기분에 젖어있던, 처칠의 보수당 정권에 비해, 발 빠르게 좌파적이고 현실적인 복지정책을 약속해 애틀리의 좌파는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 후 좌파적 정책을 실행하여 영국기업의 20% 정도를 국유화했고, 가장 잘한 정책으로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최초로 작동시킨 것을 지금도 꼽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틀리는, 10여 년 전에 소련의 선전 세트만을 방문한 후에 소련체제를 찬양하였던 ‘버나드 쇼’와 같이 어리석지 않았고, 전체주의의 또 하나의 광기가 소련과 그 하수인들에게 미치는 것을 분명히 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동당 내에서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했으며, 소련의 첫 핵실험(1948)의 무서운 위험을 잘 인지했고, 그것에 대항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설에 미국과 함께 앞장서는, 실용적 좌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요청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호응하여, 한국과 가장 가까운 홍콩과 싱가포르의 영국군을 먼저 급파한 겁니다. 심지어 안경과 틀니를 무료제공하기로 한 좌파적 복지예산까지 깎아, 한국동란전비를 비롯한 냉전 재무장 비용으로 47억 파운드를 마련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파주전투(1951.4.22~4.25)에서 마지막 한 발의 총알까지 소비하는 치열한 전투로 중공군의 서울진격을 막아낸 영국군 덕분에 현재까지 파주 위쪽에 서부 방어선이 형성되어 북한과 대치하게 된 겁니다. 

 2. 일반적으로 좌파들은 꿈꾸는 듯한 이상적 성향을 가지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룰 능력도 없을 뿐 아니라 또 본인들 스스로 희생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항상 타락이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현재의 남한 좌파의 정권에도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의 좌파는 영국적 경험성 우선이라는 원칙에서 비롯된 실용성의 DNA라는 놀라운 정치적 역사적 본능을 가졌기 때문에, 타락이 훨씬 적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의 영국의 정치역사에서도 드러났는데, 정권이라는 것은 정당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치게임이라는 점을 이들은 잘 구현한 겁니다. 그 이후 애틀리가 좌편향으로 지나치게 편향되었다고 판단한 영국인들은, 그 뒤를 다시 처칠(1951~1955)에 이어 이든(1955~1577), 그리고 맥밀런(1957~1964)까지 14년의 보수당정권이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노동당의 헤럴드 윌슨(1964~1970)으로 넘어갔다가, 잠시 보수당 히스(1970~1974)로 이어졌지만, 또 다시 노동당의 윌슨이 재등장(1974~1976), 그리고 같은 당의 켈러헌(1976~1979)이 연속해서 집권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와중에 좌파적 경향이 너무 심해 흥청망청 써대던 국부유출로 엄청난 나랏빚을 지게 되었고, 그 자부심이 많던 대영제국이 수치스럽게도 한국보다 먼저 IMF체제를 경험했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사람이 ‘철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11년 동안 장기 집권한 보수당의 ‘대처수상’(1979~1991)입니다. 그 이후에도 보수당과 노동당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지금은 영국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영국적 기운이 강하게 일어나 잘 알려진 브렉시트를 감행하는 보수당정권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게임으로서의 정치’를 모르는 한국은, 100년 정권을 장악할 듯이 떠들어대던 지난 노무현 정권 때나 지금의 좌파는 한 번 정권을 잡으면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자신만이 절대 옳다는 이데올로기적 근성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조선의 당쟁이나 공산주의의 정권투쟁의 역사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에, 거짓말, 강변을 비롯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권하고 그것을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는 경직성을 가지게 된 겁니다.


 그렇지만 영국 좌파의 이런 실용적 경향은 그 이후에 유럽 사회뿐 아니라 미국, 일본까지 흔들어놓았던 68혁명(1968년에 일어난)의 시기에, 영국인들이 취한 행동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좌파들은 프랑스에 여전히 남아있던 드골적이고 고전적 성향에 반대하여, 공산주의 쪽으로 심하게 경도되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수정한 수정주의적인 소련에 대항해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마오쩌뚱을 숭배하고 마오사상을 찬양하여 마오어록까지 공부하는 철학자들과 무리들까지 프랑스에 생길 정도였습니다. 또 미국은 당장에 벌어지는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히피운동’이 결합되어 혁명의 기운을 표출하였으며, 일본도 과격하고 폭력적 사회전복을 꿈꾸던 공산주의자들이 ‘적군파’를 형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당시 프랑스에 가서 그 혁명을 직접 체험했던 철학자 ‘로저 스크루톤’(Roger Scruton, A Short History of Modern Philosophy 1981)이 그랬듯이, 영국 노동당은 그런 시대적, 유럽적 경향에서 영국 본연의 장점인 경험성에 기초한 실용성을 채택하여 체제 전복적이고 붉은 피를 흘리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런 시기에 노동당이 장악한 시간(1964~1970,1974~1979)이 보수당의 기간(1970~1974)보다 길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유럽적 분위기 속에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좌파적 경향 때문에 국민 개개인의 생산력은 국가의 동력과 함께 치명적으로 낮아져 대처 수상 이전에는 유럽의 2등 국가의 지위까지 내려앉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3.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 영국 좌파는 더 깊은 영국의 역사적 기원 두 가지에 확고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헤이스팅스전투(1066)에서 노르만의 윌리엄은 헤럴드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승리 후, 윌리엄은 이미 있던 헤럴드에게 복종했던 귀족과 신민들에게 폭압적 정책을 시행했지만, 장기적 정권의 안정과 신민의 지속적인 복종을 받아내려면 유화를 통한 장기적 통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시행합니다. 그래서 영주들에게 자치를 주기 시작했으며, 신민들에게 자유를 주는 정책을 대를 이어 시도하였습니다. 그런 세월이 백 여 년 흐르면서, 영주들과 신민들의 힘이 세어져, 결국 최초로 왕권을 법적으로 제약한, 대헌장이라고 번역되는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1215)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 이후 사백여 년에 걸쳐서 지배하는 정권과 지배받는 신민 사이의 관계에 오랜 역사가 쌓이면서, 정치가 합리적으로 발전하여 결국 왕권을 결정적으로 제어한 무혈혁명인 명예혁명(1688)을 성공시키게 됩니다. 즉 ‘군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세워, 삼백 년 이상 지금까지 훌륭하게 국가를 운용한 겁니다. 그렇지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놀라운 영국적 사실을 매우 새로운 각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프랑스혁명 당시에 프랑스에서 살아보았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가 그랬듯이, 영국해협 건너편인 프랑스에서 매우 잔악하게 진행되어 유럽을 극단적인 혼란으로 몰아갔던 100년 후의 프랑스혁명(1789)과 영국의 명예혁명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우리가 경험하는 중국의 황제공산주의, 북한의 악랄한 왕조공산주의, 남한 좌파의 원조인, 공산당선언(1848)은 그 뿌리가 모두 프랑스혁명에 있다는 무서운 사실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다시 단순명료하게 질문해봅시다. 엄청난 폭력과 수많은 피를 흘렸으며 사회를 극단적으로 몰고 간 프랑스혁명, 그리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 발전시켰던 영국의 명예혁명 중에, 어떤 것을 택하실 건가요? 헛된 자부심이 많은 프랑스인들 외에 전 세계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영국의 명예혁명을 택할 것이 자명합니다. 


 자, 이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던 영국군을 비롯한 16개국의 군인들은 떠나갔고, 우리만 여전히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앞에서 살아온 지 벌써 70년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남한의 좌파가 걸어가는 자체적 파괴적인 길이나, 한국적 우파가 가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길을 넘어서, 지혜로운 영국좌파나 건강한 대항마가 되었던 영국우파에게서 배울 것은 없을까요? 심지어 영국이 만들어 내었던 (건강한) 우파-좌파의 정치구조 자체도 사실상 결국 냉혹한 유럽문화(명)가 만들어 낸 정치적 특설 링에 불과합니다. 그런 정치적 도식 자체를 극복할, 따뜻하고 선명하고, 공의롭고, 자비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정치체계와 철학을 우리는 만들 수 없을까요? 

 

주석

1) 푸틴이 새로운 황제(차르)로서 평생집권을 위해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하여 헌법을 고치려는 것도, 종교가 정치(황제)의 시녀노릇을 천 년 이상 하던 정치적 역사적 DNA가 각인된 러시아인들 속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9>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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