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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반찬

2020년 11월호(13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2. 1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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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반찬

 - 공 광 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삽화 - 배유진(고1)

 

같이 생각해 보기 

비대면 시대의 외로움과 슬픔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이 묘사한 탁월한 작품입니다. 아마 장년-노년기에 이른 어떤 아버지의 시각으로 표현된 듯합니다. 못살던 그 때의 ‘밥’의 질은 별 볼일이 없어서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얼굴’들이 하나씩 새록새록 기억나는군요. 그런 얼굴들이 요즘으로 치자면 맛깔난 ‘반찬’이었고, 가끔 먹는 풍성한 ‘외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중늙은남자의 이른 새벽과 늦저녁의 밥상머리는 대화 없어 쓸쓸합니다. 같이 상을 마주 하고 스스로를 가축으로 여기듯 ‘사료’를 입에 퍼 넣고 10분도 안되어 후딱 자리를 뜨는 아들과 딸, 곰국과 육개장 잔뜩 끓여놓은 뒤, 엉덩이 털썩거리며 학창시절 동창들과 떠날 여행바람이 난 아내.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처리되어야 할 답답한 우리네 일상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얼굴’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것보다 훨씬 잔인한 인간(독일인) 앞에 절절하게 호소하는 유대인의 얼굴을 드러내는 철학을 했습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제발 나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던 예수는 자기를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 얼굴을 돌려서 쳐다보았습니다.(누가복음 22:61) 결코 증오나 원망의 ‘얼굴’은 아니었을 겁니다. 독일인을 준엄하게 꾸짖는 진지한 철학자의 ‘얼굴’, 그리고 제자의 배신을 감내하며 죽음의 강을 건넌 후에야 새롭게 될 제자들을 고대는 진짜 종교의‘얼굴’은 이 시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homo ludens)만 덩그러니 남는, 21세기 서구문화(명)의 허망함과 쓸쓸함만을 문학적으로 잘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3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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