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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족제비

2021년 1월호(13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2. 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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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족제비

구렁이가 족제비 새끼 네 마리를 삼키자 족제비 부부는 대나무 홈통 같은 구덩이를 판다. 구렁이를 유인하여 그 속에서 옴싹 달싹 못하게 한 후 구렁이를 깨물어 죽인다. 이후 구렁이 배를 갈라 새끼를 꺼내 콩잎 위에 눕히고 닭의장풀을 두툼하게 덮는다. 그러고서 잎사귀 속에 주둥이를 묻고 기운을 불어넣자 네 마리 새끼들이 꿈틀꿈틀 살아난다.《이덕무의 관찰일지》중에서

카메라 렌즈로 잡아내는 다큐멘터리보다 더 생생합니다. 구렁이가 무슨 색인지, 얼마만 한지는 몰라도 족제비들이 낙담하지 않고 지혜를 모아 다시 새끼를 생환하는 노력만큼은 눈에 선합니다.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통합니다. 
2020년은 족제비 가족에게 날아든 횡액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점령해버린 한 해였습니다. 외국에서 가족이 돌아왔는데도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멀리서 고무장갑을 낀 채 손만 흔들고 돌아왔다는 친구의 말에, “이게 바로 지옥이지.”라고 씁쓸하게 덧붙이고 말았습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둠 수업은 꿈도 못 꾸고 마스크만 쓴 채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하며 1년을 보냈습니다. 현장체험학습도 체육대회, 동아리 발표도 없앴습니다. 오로지 네 번의 지필고사만 엄숙하게 치러냈습니다. ‘밥 먹으며 정든다’는 말도 있는데, 일렬로 앉아 친구의 등만 바라보면서 수저를 달그락거리는 식사 풍경, 게다가 그것을 감시하는 교사의 역할은 아무리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도 자꾸만 무너졌습니다. 그 와중에 몇몇 아이들과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일동안 매일매일 글을 쓰자고 제안했더니 한 반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신청을 했습니다. 기억하기 좋게 8월 15일에 시작했습니다. 11월 25일에 완주한 학생의 글을 올려봅니다.


#100 < 99 >
100일 글쓰기가 오늘로 끝이 난다. 비록 홀로 맺는 끝이지만 나에게 그 의미는 대단하다. 대미를 장식할 이번 글을 어떤 주제로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아직 나에게 소재거리들이 많이 있어 그 중에서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 감정을 솔직히 써보려 한다.

처음 100일 글쓰기에 참여의사를 보였을 당시, 그 때 손을 들었던 건 학교 신문에 쓰인 글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 단순히는, 재밌어 보였다. 잠들지 못하는 3시 무렵에 시 쓰는 걸 즐기던 나로서 글이란 친숙한 존재였다. 게다가 1년도 아니고 고작 100일이라면 한 석달 정도이니 그리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첫날, 아직도 기억이 난다. 종이에 이것저것 생각나는 걸 적다가 강연이 생각나 적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내 글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떠오른 주제는 발판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이 점이 글쓰기의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진중하고 곧게 한 가지 주제로 끝까지 밀고 나가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100일 글쓰기 폴더에 100개의 글이 쌓인 걸 보니 내가 정말 뭔가를 해 냈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이다가도 금세 차분해졌다. 이 결승선까지 오는 길에‘그들’이 없었다면 난 분명히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격려 한 마디, 친구들의 공감 한 마디에 더 좋은 글,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왔고, 눈을 뜨고 다시 감는 그 순간까지 소재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도 나의 소재 창고에는 아직 먼지를 미처 닦아내지 못한 보석들이 그득하다. 

글쓰기를 하다 보니 나에 관련된 모든 것에 신경을 쓰게 되고, 나를 성찰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 예방에 그렇게 좋다나 뭐라나. 무튼, 매일 나의 삶을 바라보고 작은 변화에 관심을 가져보니 우리의 일상에 참 아름다움을 느낀다. 스케쥴러를 보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인 듯 싶지만 매일 만나는 다른 사람들, 다른 색들, 다른 생각들은 나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나의 새로운 취미를 이대로 보내주기는 너무 아쉽다. 그래서 난 100이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나 이젠 자유로운 나비가 되어 더 새로운 세상을 만나려 한다. 지금까지 써 본적 없던 글, 조금 더 깊고 진한 색의, 아니 색을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까지도. 
- 나의 영원한 99를 응원한다. (발곡고 나도윤)

2021년이 다가옵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아직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해냈습니다. 학교 교육을 삼켜버린 구렁이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지지 않고 학생들을 온라인 글쓰기로 끌어내 숨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 덕에 저까지 되살아났습니다. 
새해는 구덩이를 여러 개 파놓고 코로나를 유인하여 함정에 밀어 넣은 뒤 그동안 삼켜버린 ‘관계, 소통, 자유, 여행’을 토해놓으라고 다그쳐야겠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잃었던 소중한 것들과 새해에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습니다. 

 

경기도 의정부시 발곡고등학교 교사
《그 겨울의 한 달》저자 박희정

hwson5@hanmail.net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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