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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 공정으로 꽃 피운 얼음 꽃, 빙사과(氷沙菓) 장인 ‘홍성란’을 만나다

2023년 1월호(15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 1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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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13번 공정으로 꽃 피운 얼음 꽃, 
빙사과(氷沙菓) 장인 ‘홍성란’을 만나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유과, 빙사과

 

제2의 고향, 강원도 영월
저희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서 정미소와 방앗간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집안의 장남으로 인물이 훤하시고 마음도 좋아 사람들이 잘 따랐어요. 그러다보니 유혹도 많아,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강원도 영월로 가셔야 했죠. 영월엔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사셨는데, 아버지는 거기서 다시 방앗간을 시작하셨습니다. 제 기억에 의외로 음식솜씨가 좋으셨던 아버지와 음식솜씨가 남달랐던 고모 덕에 그곳에선 항상 먹을 것이 풍부했어요. 강원도 영월은 저에게 제2의 고향이랍니다.

우리 고모는 동네 ‘과방장’
‘과방’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한마디로 ‘과자방’이죠.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고모는 특히, 정교한 음식을 잘 만드셨어요. 예전에 동네에서 잔치를 하면 한달 전부터 준비를 위해 광이나 방을 정해 ‘과방’을 차립니다. 항상 고모가 ‘과방장’이 되셨죠. 차려진 과방에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 저는 어리기도 했지만 그냥 통과 했어요. 이곳에서 여러 음식도 많이 보고, 약과와 과즐(과줄의 옛말로 순 우리말, 꿀과 기름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판에 박아 모양을 낸 후 기름에 지진 과자)등을 예쁘게 만들고 떡, 대추 고임 등 여러 고임을 하는걸 보며 자랐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기억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겨울이면 늘 과즐과 약과 엿을 만들어 항아리에 저장해 수시로 먹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였지만 저는 감사하게도 어릴 때부터 풍족하게 먹었고, 다양한 음식의 형태와 만드는 법을 고모의 어깨너머로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음식은 기억이고 추억이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음식솜씨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이 납니다. 제가 만든 부침개가 맛있다는 어른들의 칭찬에, 추운 겨울 날 엄청나게 많은 김치 부침개를 부치기도 했지요. 또 전기곤로 등으로 음식을 할 때라 불이 시원치 않아 밥하기가 어려웠는데, 제가 양은솥에 밥을 하면 밥알이 보기 좋게 섰어요. 아마도 센스 있게 불 조절을 잘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음식에 소질이 있으면 요리 쪽으로 진로를 정하면 되지만, 저희 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혼 전까지 유치원에서 일했는데, 손재주가 있어 교구를 직접 만들어 교재로 사용했고, 재미있게 말을 구사해서 구연동화를 주로 했어요. 결혼 후, 시댁에 제사가 있으면 어릴 때 어깨너머로 본 기억을 더듬어 편을 찌고 화전을 부쳐 웃지지까지 올려 가져갔습니다. 가정학과 나온 종부보다 음식을 잘 해, 늘 어른들께 칭찬을 받았죠.   

 

궁중음식을 배우며 약과에 미치다
주위에서 음식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듣다보니, 내가 솜씨가 있긴 있나보다 하던 차에 불현 듯 어릴 때 먹어본 약과가 생각이 났어요. 그 약과를 아무리 시중에서 찾아 봐도 없더군요. 그래서 이것을 어디서 배우면 좋을까 하고 수소문 하던 중, 신문에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음식을 배울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였죠. 연구원은 고즈넉한 창덕궁 비원 옆 맨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작아 실망도 되고, 수업료도 만만치 않게 비쌌지만 오로지 음식을 배우겠다는 열정으로 뛰어들었죠. 그때가 26년 전인 마흔 한 살 때였습니다. 물론 약과를 배우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궁중이라는 로망도 있었죠. 그 당시 ‘궁중음식연구원’은 지금의 스승인 한복려 선생님의 어머니, 무형문화재 38호 황혜성 선생님이 주관할 때였습니다. 궁중음식반에 입문하여 한참 배우는데 제가 배우고자 하는 약과 과목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한쪽에 한과 연구반이 있어 그곳을 보니 개성약과가 있더군요. ‘아! 이건가?’하며 바로 등록을 했죠. 둘째 날부터 개성약과를 했는데 저는 무릎을 딱 치며 ‘그래 이 맛이야’했습니다. 그건 바로 어릴 적 고모가 해준 맛이었어요. 사대부 집안이었던 고모는 궁중음식과 반가음식(사대부 집안 음식)의 교류로 이 맛을 알고 만들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때부터 저는 더 몰입해 미친 듯이 밤낮으로 약과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아~ 음식이 나에게 맞는구나’를 더 확신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폐백, 이바지반에도 등록해 음식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선생님들을 개인적으로 찾아다니며 연습과 노력으로 제 음식의 품격을 점차 높여갔습니다.

 서울역 지하, 노숙자의 신문 한 장이 이리 따뜻하다니!
그런데 저보다 더 음식에 미친 춘천에 사는 동료가 있었어요. 1998년 그 친구와 함께 떡 축제가 있는 경주에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4월말이었는데 얇은 스웨터만 입은 데다, 비까지 내려 엄청 추웠죠. 그래도 끝까지 다 둘러보며 마지막 기차를 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쪽 편에 어떤 분이 곱게 한복을 입고 떡을 오리, 사탕 등의 모양으로 빚고 계시더군요. 너무 신기해 계신 곳과 성함을 물어보고 서울에 가면 바로 배우러 가겠노라 했습니다. 그분이 저의 음식의 완성도에 화룡점정을 해주신 최순자 선생님으로 그 이후 많은 분들이 찾아 배우게 되었죠. 그날 경주에서 끝까지 다 보고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어요.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추워서 지하도로 들어갔는데, 그때가 IMF시절이라 노숙자들이 정말 즐비하더군요. 저희 둘은 오들오들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떨며 서로 껴안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노숙자가 신문을 여러 겹 덮고 자더라고요. 춘천 친구가 “신문이 따뜻하다던데 신문 한 장 훔칠까?”(웃음) 하지만 그 친구는 용기가 없었고 제가 한 장을 뺐죠. 노숙자가 움찔 움직이니 너무 무섭더라고요. 그 한 장을 빼서 덮었는데 아주 따뜻하더군요. 그래서 한 장을 더 훔쳤어요. 오~ 솜이불보다 따뜻했어요. 지금은 재밌는 추억이 되었지만, 신문에 대한 그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떡 케익, 처음으로 시도하다
 음식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넘치는 의욕으로 명일동에 ‘예지당’이라는 폐백 전문점을 차렸습니다. 교육도 해야 해서 34평 규모로 좀 크게 시작했어요. 그 누구도 비껴 갈수 없이 다 망하던 IMF시절에 저는 거꾸로 사업을 시작한 거죠. 처음에는 잘 되어 의기양양했는데, 날이 갈수록 사람이 줄어들어 실의에 빠졌습니다. 넓은 공간을 떡 만드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결정과 함께 ‘축하를 떡 케익으로 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지요. 그 당시 떡 케익을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데 떡 만드는 시간보다 떡 위에 장식 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거예요. 떡 만드는 시간이 30분이면, 떡 위의 장식인 꽃 만드는 시간은 1시간 이상으로 부가가치가 없었죠. 그래서 떡을 만들어 판매하기보다 가르치기를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L백화점 문화센터 떡 강의를 시작으로 한동안 서울시내 모든 백화점 문화센터 ‘떡 선생’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예지당은 접을 수밖에 없었죠.

 

꽃송편


 얼음 꽃, 빙사과(氷沙菓)에 몰입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유과의 종류 중 빙사과를 배웠습니다. 유과를 만들고 남은 부스러기를 절구에 찧어 기름에 튀겨 만든 게 빙사과입니다. 이 빙사과를 궁중의 잔치에 올렸다는 기록도 있어요. 빙사과는 얼음조각을 기워 놓은 듯한 과자, 입속에 들어가면 얼음처럼 사르르 녹아버리는 과자입니다. 어느 날, 집 냉동실에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수업하고 받아온 부스러기가 뭉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의욕이 넘쳤던 저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부스러기를 일단 가져와 냉동실에 넣어놓았던 거죠. 그것을 꺼내어 튀겨보니 하얗게 튀겨지더라고요. 이때부터 더 빙사과에 몰입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과즐은 고물을 묻히는데 빙사과는 고물을 묻히지 않고, 그 자체로 꿀과 물엿을 묻혀 내는 거라 밑바탕이 예뻐야 합니다. 처음에는 흰색만 있었어요. 하지만 더 다양한 색을 입혀 삼색으로도 만들어 보았죠. 흰색과 녹차의 종류인 말차로 녹색을 내고, 분홍색을 내기 위해 백년초를 사용하니 점성 성분으로 한쪽으로 뭉쳐져,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 맨드라미 청을 만들어 색을 내었답니다. 빙사과를 처음 배울 때, 스승님은 가위로 자르라 했지만, 재료가 찹쌀이라 바로 가위나 칼로 자르면 모양도 예쁘게 되지 않거니와 자르는데 능률도 오르지 않아, 1차 건조시킨 후 수분을 조절하여 칼로 썰어 보니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지요. 만들어 볼수록 오묘한 향과 맛의 빙사과에 완전 매료되어 쌀 몇 가마를 버릴 정도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제품으로까지 만들었습니다. 빙사과는 굉장히 까다로워요. 13번의 공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별명을 지었어요. ‘눈물 꽃’이라고! 그만큼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한다는 의미죠. 그런데 사람들이 ‘눈물 꽃’이라고 하면 슬퍼 보이니, ‘얼음 꽃’으로 하라더군요. 그래서 이 두 개를 같이 씁니다. 

 

꽃다식

 

 너무 앞서가다! 한국식 디저트 카페, ‘수수꽃다리’
외부강의를 하며 빙사과로 알려지면서 유명한 폐백 전문점이나 떡집에 납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하니 한계가 오더라고요. 이게 모두 손으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어깨도 너무 아프고 몸이 망가지더군요. 무엇보다 납품을 받는 곳에서는 싸게만 받아 비싸게 팔려하니 이것은 아니다 싶어 그만두고, 개개인에게 판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한국식 디저트 카페로, 라일락의 순 우리나라 말인 ‘수수꽃다리’카페를 올림픽공원 앞 건물 2층에 차렸어요. 제 솜씨만 믿고 차렸는데 시장조사를 제대로 안 한 게 문제였죠. 주차도 큰 문제였고요. 컨설팅하신 교수님이 메뉴는 너무 좋은데 장소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하셨어요. 손해를 엄청 본 후, 3년 만에 문을 닫고 양평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오픈 했다면 차별화된 메뉴로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즈음 하기에는 너무 앞선 아이템이었던 거죠.

 마지막 수랏간 상궁, 무형문화재 38호 ‘한희순’을 잇는 스승들에게 배우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상궁, 한희순 상궁을 마마님으로 모시고 음식을 배우신 분이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 황혜성 선생님이셨어요. 이분이 궁중음식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계량을 시작하셨습니다. 한희순 상궁이 재료를 넣을 때 마다 “잠깐만요”를 수없이 외치며 한 스푼, 1/2스푼… 이리 계량을 한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다 글로 남기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기면서 첫 번째로 제자가 스승을 무형문화재 38호로 등록되게 했죠. 한희순 상궁님에서 황혜성 선생님으로,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따님인 한복려 선생님이 그 뒤를 이어받으셨고요. 황혜성 선생님과의 일화로는 제가 빙사과를 만들다 의욕에 넘쳐 빙사과 위에 깨를 뿌리고 대추를 썰어놓으니, 이것은 빼는 게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지요. 이런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스승의 한마디에 평가가 다 있거든요. 어느 날은 민속박물관에 행사가 있어 빙사과를 만들어 가지고 갔는데“이것을 누가 했는지 그 사람을 불러와라”라고 하셔서, 부름을 받은 저는 겁이 나고 엄청 쫄았죠. “이것을 당신이 했느냐?”하시길래 그렇다고 하니 “이게 너무 아름답고 좋으니 내가 먹은 거나 진배없다. 여기 박물관장을 드려도 되겠느냐”며 저에게 동의를 구하셨죠. 당신 마음대로 주는 것이 아닌, 저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신 것이죠. 그 다음 달인 스승의 날에 다시 만들어 갖다드리니 “아! 보기 좋구나 완성도가 높다”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계속 연구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반면 따님인 한복려 선생님은 묵묵히 탐구하시며 뭐든지 공부하고 꾸준하신 분이시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접고 양평에 있었을 때 한복려 선생님이 저를 다시 끌어내주셨어요. “우리는 음식을 다 할 줄 알아야 하지만 한 가지만이라도 특출 나게 잘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리 말씀하신 것은 ‘빙사과 하면 홍성란’이라고 할 정도로 제가 빙사과에 몰입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유일한 유과인 빙사과, 이어져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100여 명을 가르치면서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제가 빙사과를 만들어 선배들에게 무수히 보이며 그 가운데 받은 조언을 적용해 다시 만들어보고 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만들어 “언제든 가져오라!”라고 합니다. 일단 제가 봐야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잖아요. 하지만 단 한명도 가져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배울 때는 의욕이 넘쳐 배우지만 돌아가면 못하는 거죠. 그 정도로 어려운 과자입니다. 음식을 하는 분들도 빙사과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내가 죽으면 맥이 끊기는 것이니 얼마든지 너희들이 할 때 안 되면 나를 부르라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이리 시도를 못하고 있음에 안타까울 따름이죠.

 


나의 최종목표
그래서 저의 최종 목표는 빙사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점차 많아져 맥이 이어지고, 보존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과와 떡은 많이 만들어 보았기에 연구소를 차려 자신 있게 후배양성을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제자들이 저에게 배우고 난 후, 판매하게 될 때 저의 모든 노하우를 알려주고자 합니다. 빙사과를 꾸준히 상품화 하며 선배로서 먼저 겪었던 목마른 것들을 말이죠. 예를 들어 약과 하나를 만들어 가격을 얼마로 책정하는지부터 도구, 시간계산 등 말입니다. 심지어 저는 마땅한 도구도 없어 제가 거래하는 방산시장 가게에 부탁해 직접 도구도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시중에 제가 만든 도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빙사과 틀, 약과 틀 등 여러 가지 도구가 있답니다.

추운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홍성란 선생님과의 인터뷰 속에서 얼음 꽃 빙사과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빙사과는 겨울에 15일, 여름에는 7일 정도 삭혀 만드는 발효음식으로 기름에 튀긴 유밀과라고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짚어주셨어요. 무엇보다 약과와 빙사과는 누구나 할 수는 있으나 까다로운 과자로 맛있게 하기 힘들고, 멋있는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더욱 많은 공이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인터뷰 내내 ‘이런 빙사과가 홍성란 선생님 대에서 끊기게 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유일한 과자인 빙사과가 세계에 드러나야 하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26년을 달려오며 홍성란하면 빙사과, 빙사과 하면 홍성란의 등식을 만드셨으니까요. 모쪼록 2023년 새해, 홍성란 선생님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발걸음을 강서구 마곡에서 산본으로 돌렸습니다. 

 

한식예술장인 서보 홍성란
·궁중음식문화재단 지정 한식예술장인

·조과부문 빙사과 장인
·빙사과/전통음식연구가
·떡, 한과 명인
·롯데, 현대, 신세계, 아이파크 백화점 
한식디저트강사 역임
·전통음식 다수전시
·전)폐백, 이바지 전문점 예지당 운영
·전)한식디저트카페 수수꽃다리 운영
·전통음식 전문강사
·폐백, 이바지 전문강사 
·궁중음식연구원 음식선물반 출강
·현)홍성란의 맛과 멋 쿠킹클래스 운영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9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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