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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두 번 사는 여자

2023년 1월호(15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6. 2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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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두 번 사는 여자

 

 고등학생인 큰 아이는 새벽 6시 반이면 스쿨버스를 탄다. 덕분에 나의 하루도 꼭두새벽부터 시작된다. 아침잠 많은 나로서는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지만, 어찌 됐건 식빵을 구워 치즈와 햄을 올린 샌드위치로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그러는 중에 중학생인 딸아이도 잠에서 깨어 돌아다닌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도시락과 아침을 미리 준비해 놓고 내가 먼저 수업을 위해 방에 들어간다. 새벽 여섯 시, 혹은 일곱 시, 때론 여덟시. 나는 강의를 듣기도 하고, 토론에 참여하기도 하고, 내가 강사로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무슨 새벽부터 수업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내가 참여하는 수업들은 거의 다 줌 그리고 한국,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새벽은 그들의 저녁, 나의 아침은 그들의 밤이다.


나는 하루를 두 번 혹은 세 번 사는 여자다. 나의 하루는 새벽에 한국과 한번, 현실로 돌아와 미국과 한번, 오후 세시 반쯤 한국의 새벽과 한번 이렇게 몇 번을 새로 시작한다. 오전 7~8시쯤 강의를 듣거나 수업을 하고 한국에 있는 그들과 굿나잇 인사를 나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좋은 밤 되세요” 수업 중에 때론 피곤함에 하품을 하고 졸고 있는 학생도 보인다. 안쓰러움에 수업을 마무리하고 얼른 침대에 들어가라고 인사를 하고 나면 이곳은 이제서 아침. 상쾌한 아침이건만 때론 모두 잠든 고요한 밤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곳의 친구도 만나고, 장도 보고, 아이들이 올 때까지 할 일들을 하다 보면 미국시간 세시 반경. 카톡방이 시끄러워진다. 한국에서 다섯 시 반‘미라클 모닝’을 하는 친구들이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리다. 나에게도 갖가지 질문, 의논, 수다 등등이 카톡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업무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오후 한낮의 적막감에 왠지 노곤해졌던 나는 새벽잠에 깨어난 그들과 함께 다시 에너지를 충전한다.

 

한국에서 국어 교사로 중학교에서 재직하다 14년 전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다. 중간중간 한국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이리저리 공부도 했지만, 십여 년의 대부분을 육아와 가사에 시간을 바쳤다. 워낙에 외향적이었던 나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은 늘 병처럼 따라다녔고, 그걸 채우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우리 집을 동네의 사랑방 역할로 자청했다. 집은 늘 이웃들로 바글바글했고 이웃 아이들의 놀이방이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팬데믹과 함께 모두가 한꺼번에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때 나에게 찾아온 것이‘글을 써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즉 SNS였다. 나는‘블로그’라는 공간을 선택했고 그 순간부터 책은 글로, 글은 마음으로, 마음은 소통으로, 소통은 다시 글로, 그리고 출간으로, 작가로, 독서토론 리더로, 에세이수업 강사로, 갖가지 또 다른 도전의 기획으로 이어졌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며 나는 다시 과거의 내 모습을 찾고 나만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과 미국을 실시간으로 이어주는 화상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덕분이었다. 


또한 커리어를 다시 찾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통로들을 통해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같은 책을 읽고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고 줌으로 토론을 하고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보며 격려하고 힘을 얻는다.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다독인다. 그 소통은 내게 붙잡고 싶은 지금 이 순간의 에너지원이고, 너무 멀어져 버린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소중한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이기도 하다.
미국에 사는데 영어로 하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영어공부를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이민 생활을 통해 오히려 분명히 알게 된 건‘나는 한국어로 책을 읽고 표현하고 글을 쓰고 소통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국어를 좋아했고 국문학 공부를 했으며, 국어 교사로 아이들과 나누는 삶을 사랑했던 내게 그 끈을 놓아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지금 나는 안다.


다시 한국에 가서 살게 될지, 고향에 가서 어릴 적 꿈꾸던 작은 책방 운영을 하며 살게 될지, 영원히 미국에서 뼈를 묻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는 게 있다던가!) 하지만 바뀐 세상의 플랫폼으로 인하여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의 삶을 느끼고, 미국에서의 삶에도 전보다 더 만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벌써 12월이다. 아직 이곳 메릴랜드에는 눈이 오지 않았지만, 바람은 매섭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의 코끝이 루돌프처럼 빨갛고 차갑다. 아이들의 책가방과 함께 겨울바람이 집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아,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니 한국 미라클 모닝방의 카톡이 시끄럽게 울려댄다. 내년의 계획을 세우며 다들 마음이 분주하겠지. 나 또한 내년 계획을 슬슬 세워보아야겠다. 여전히 하루를 두 번 살겠지만 그 안에서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도록!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더 많이 진심을 다할 수 있도록!

 

미국 메릴랜드에서 임수진
밤호수 블로그
blog.naver.com/moonlake523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9>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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