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우주시대에 꼭 필요한 세계(단일)정부하에서 낙태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2022년 10월호(15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 14. 10:46

본문

우주시대에 꼭 필요한 세계(단일)정부하에서 
낙태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그리고 우주로 평화롭게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세계(단일)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정부 하에 공정하며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치밀한 세계법, 우주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 이것을 연습할 수 있는, 비록 범위는 좁지만 좋은, 역사적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과 미국의 법입니다. 미국은 각각의 독립된 나라에 해당하는 50개 주정부(state)가 모여 하나의 연방정부(United States)를 이루며, 여기에 개별 주가 만들고 운영하는 주법과 함께 거시적 연방적 사안을 처리하는 연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위법인 주법과 상위법인 연방법의 관계를, 최근에 문제가 되는 낙태라는 사례를 통해 살펴보며, 앞으로 세계(단일)정부에서 필요한 개별국가법과 세계법, 우주법의 상관관계를 미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부산 UN조각공원에서


미국의 낙태법
올해 미 대륙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는 바로 ‘낙태’입니다. 먼저 미국에는 연방법이 주법에 우선한다는, 가장 근본이 되는 헌법 6조의‘연방법률 우위의 원칙’(Supremacy Clause)이 있습니다. 1865년, 60만의 막대한 희생자를 낸 미국 남북전쟁이 연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각 주는 연방으로부터 분리, 탈퇴할 수 없으며, 일단 연방법이 제정되면, 각 주는 법원에 그 적법성에 대해 판단을 구할 수는 있지만 거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낙태에 대한 구체적 입법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는 헌법상 권리로 가능하다고 판결을 내려, 미 전역에서 주 자체적으로 낙태를 금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려 49년이 지난 올해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전면 뒤집으면서, 그동안 헌법으로 보장되어 온 낙태권의 존폐에 대한 결정이 이제 주 정부와 주 의회의 권한으로 넘어갔습니다. 한마디로, 이전에는 낙태를 막는 것이 불법이었지만, 낙태를 불법으로 결정하는 주가 생길 수도 있게 된 겁니다.
이에 미국 50개 주 중 절반은 낙태 관련 새로운 규제나 금지 법안을 마련할 예정이며, 이미 13개 주에서는 법적효력이 발생하면 낙태를 자동으로 불법화하는 ‘방아쇠 법’(trigger law)들을 통과시켰습니다. 반면 미국기업들은 낙태지원 복지제도라 하여 직원들의 원정낙태비용을 기업에서 부담하겠다고 주의 결정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체성
우선 질문해야 할 것은 이런 결정을 한 미국의 연방과 주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법체계를, 앞으로 이루어야 할 세계(단일)정부와 세계법, 우주법과 개별 정부법의 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따라야할 표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무엇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먼저 숙고해야 합니다. 지금은 제1강대국이 된 미국의 파워가 그동안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미국이 만든 문화, 제도, 제품은 어느 정도 보증되고 일반화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이 아주 특수한 사회’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로 구성된, 오랫동안 한 지역에 오래 살아왔던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민족들과는 달리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이민사회’입니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300년이 채 되지 않은 ‘매우 짧은 역사’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흔히 가지기 쉬운 심리적 불안 때문에 미국인들은 사회 전체나 공동체를 생각하기보다는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즉 사회에 대한 책임과 배려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미국의 법과 제도는 이런 사회적 상황 가운데 형성되었기에, 낙태에 대한 사법논쟁을 다룰 때에도 이 특성을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50년 전의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만들어졌던 시대정신인데, 그것은 당시는 ‘포스트모던 운동’, ‘페미니즘’, ‘히피운동’ 등을 따라 여성 개인의 권리를 많이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운동도 어느 정도 상대화 되고 미국의 역사도 조금씩 깊어져가는 21세기 초에 내려진 이번 대법원의 결정이 이제는 미국이 개인의 권리보다는 개인의 사회적 책임과 다양한 주체(태아, 아버지)의 권리도 더 생각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을 미국 사회의 정신적 발전의 한 과정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계(단일)정부하에서의 낙태와 낙태법
낙태에 대한 찬반의 핵심은 ‘여성 개인의 선택’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태중의 아이를 포함한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것인가’입니다.
첫째, 임신한 여성의 관점에서 ‘내 몸, 내 선택’이라는 전제로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미국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낙태에 대해 전통적인 유럽사회에서도 다양한 찬반과 입법과정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의 낙태 찬성은 미성숙한 미국사회적 차원에서 개인적 권리를 우선하는 시각 때문인 것도 분명합니다. 
둘째, 낙태문제에 있어서 왜 임신한 여성의 선택권만 거론되어야 하나요? 여성 혼자는 아이를 결코 잉태할 수 없는데 말이죠. ‘여성의 난자권’과 함께 ‘남성의 정자권’을 같이 이야기해야하지 않을까요? 여성의 몸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는 장소이기에 정자를 준 남자의 권리가 동시에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경우 양육의 권리와 의무는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가지기에, 낙태만 유독 여성의 권리라 할 수 있을까요?
셋째, ‘아이의 미래권’은 왜 고려하지 않을까요? 태중에 있는 아이는 미래에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지는데, ‘미래’의 주도권을 ‘지금’ 발휘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현재의 논리’ 아래 아이의 생명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엄마될 사람만 가져도 되는 걸까요? 자신의 생명에 대해 일말의 결정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말이죠. 만약 아이의 미래권을 함부로 빼앗을 수 있다면 노인이 될 젊은이의 미래권 역시 지금 빼앗아도 되는 것일까요? 노인의 미래권을 함부로 없앨 수 없듯이 태중에 있는 아이의 미래권 또한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낙태금지법의 본질은 인권 자체에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태중에서 자기의 생명권을 적극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자기결정권은 ‘수동적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중의 어느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낙태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다룬 구체적 논의에서 이미 보았듯이, 낙태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근본은, 우리의 권리, 즉 ‘인권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적 세속문화와 히브리적 절대종교문화가 뒤섞인 가운데 진행된, 세계를 주도한 500여 년의 해양문화는, 인권을 종교적 차원에서 점차로 세속적 차원(물질주의적,유물론적)으로 하강시켜 정의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절대종교인 기독교의 차원에서 인격이란 ‘절대하신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 권리’에 해당합니다. 이런 관점을 반영하여 투사한 헌법이 미합중국의 헌법이 명시한 ‘천부인권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헌법 제정에 참여한 미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는 독실한 기독교인들도 있었지만, 동시대의 불신자,불가지론자인 프랑스 철학자들(볼테르 등)의 영향을 받은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천부인권, 즉 절대적 개념들을 헌법에 반영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지만, 그러면 어떻게 다른 차원에서 인권의 소중함을 설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일관된 대답을 내어놓을 수 없는 철학적 무능함과 비겁함을 보인 인물들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했지만, 자신의 종교로 변해버린 철학체계인 계몽주의를 삶의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었으며, 특히 기독교적 정신에 대한 대안을 헌법에 어떻게 명시할지를 보이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 인간에게 준 절대적 권리란 표현을 헌법에 넣는 것을 마지못해 허용하고 만 겁니다. 그리고 시대와 시대정신은 점차로 세속적으로 변해갔으며, 특히 잔혹한 19세기의, 완전 검증 불가능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허버트 스펜서가 정말 미쳤다고 판단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확대하여 사회진화론으로까지 해석하였습니다. 열등한 개인,인종,민족을, 우수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기고만장한 개인,인종,민족들이 지배,학대,말살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사회,역사관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런 사회진화론의 폐해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대인,집시,슬라브인들을 멸절시키려했던 독일에 의해서만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체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당했던 쓰라린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행한 것을, 단지 철저히 스스로를 속이고 대상을 속인 개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뒤집어, ‘탈아입구’(脫亞入口)라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유럽인이라고 속인 가운데 만든 ‘한 번 더 뒤집은 오리엔탈리즘’정도로 볼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며 핵심이 되는 사실은, 한 개인의 권리,인권을 어떻게 (절대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설정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이런 중에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경험을 하는 시기가 되었는데, 결국은 한 개인의 권리, 즉 인권 정의의 세속화,물질화가 더욱 철저하게 진행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미합중국과 그 헌법은, 이런 서양의 해양문화가 세속화되는 도중에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인 셈입니다. 그 후의 역사적 방향은, 좌편으로 기울어진 세속화,물질화로 경도된 끝판의 결과인 1973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례로 나온 겁니다. 하지만 50년의 시간이 흐른 후인 2022년에, 이것은 약간은 우편, 더 보편적,정신적,철학적,종교적 차원의 인권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번에 옛 판례를 깨트리기로 작정한 대법관 9명 중에 5명은 절대종교의 일부인 로마교의 신자들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사회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꺼려하는 종교의 정치 간섭과 같은 로마교황의 지령을 받아서 행동할 정도로 어리석고 수동적 인물들이 아니라, 인권 개념이 좀 더 우편으로 가야 한다는 명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우편으로 나갈 수는 없을까요?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모든 (상대,절대)종교들이 동의하는 보편적 기초로 돌아간다면, 더 행복한 인권 개념을 가진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생명을 신성시하여 육식을 금하는 상대종교인 불교조차도 인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생명의 절대적 가치는 절대자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절대종교적 기초 위에 앞으로 세계(단일)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가 세계헌법,우주헌법을 만든다면, 더욱 놀라운 지구 통합역사를 이루어 행복하게 우주로 나가는 우주시대를 활짝 열 수 있지 않을까요?

 

숨소프트 이송아
ssongahlee@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6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