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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당겨쓰지 않기

2023년 1월호(15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6. 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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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당겨쓰지 않기

 

 할머니께서 노란 박카스를 병뚜껑에 찰찰 담아 한 모금 주시면 그 맛이 황홀했다. 그러나 밥은 안 먹어도 박카스는 마셔야 하루를 견딘다는 아랫말 어느 과부의 중독 이야기가 소문 난 뒤로 박카스가 무서워졌다. 미래에 필요한 에너지를 당겨쓰다가는 어느 순간 내 발밑의 현재가 끝없이 지연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면 미래에 얻을 결과를 미리 당겨 달라고 보채는 스스로에 놀란다. 아이들이 무탈하기를, 부모님이 건강하시기를, 사소한 오해로 맘고생하지 않기를,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를,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를 유지하기를, 거기까지라면 괜찮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자가 되기를, 당선이 되기를, 매력을 잃지 않기를! 그런저런 소원을 주워섬기다가 돌연 나의 바람이 과욕이구나 깨닫고 서둘러 멈춘다. 벌충이라도 하듯 평화, 통일, 민주주의, 지구환경을 언급한다. 사적인 소망보다 공적인 소망은 아무리 빌어도 민망하지 않으니까. 


2023년이 다가온다. 학생들이 안분지족하면서 친구들과 즐거이 생활하고 점수보다 배움에 관심을 가지고 매 순간 행복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빌어본다. 모두가 명문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란다거나 1등급이 우리 학교 애들만 많이 차지하게 해달라고는 차마 빌지 못하겠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선현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박카스와 같은 생각은 갈증만 일으킬 뿐이라고 멀리해본다. 바라건대 새해에는 현실의 나와 이상적 나가 서로를 소외시키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며 살았으면 싶다. 내 안의 참된 나의 요구도 중요하지만 가족, 친구, 동료, 이웃, 학생에 비친 나의 모습도 중요함을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 특히 학생에 비친 나의 모습과 더불어 내게 비친 학생의 모습을 세심하고 사랑스럽게 관찰, 기록해주고 싶다.


사마천은《사기열전》을 쓰면서 목표를 세웠다. 기록으로 흩어질 영웅을 살려내자고. 형가는 진시황의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번오기의 목을 보자기에 싸서 알현한다. 단둘이 마주했을 때 품고 있던 비수를 던지지만 불운하게도 실패하고 만다. 실패한 자객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를 기록하여 영웅으로 되살려낸다. 


학년말은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신보다 높은 것이 내신’이라는 말처럼, 등급으로 찍힌 숫자는 바꿀 수가 없다. 그 숫자는 입시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때 의미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입시에 성공을 못한 경우는 어떡해야 하나? 숫자 뒤에 숨어 있던 노력은 허사가 되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에게만큼은 누군가 바라봐주고 있음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배움과 성장을 위해서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진수는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약했다.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 처음에는 열심히 하겠다고 열의를 보이다가도 십분 이상 집중을 못한다. 특히 고문이나 문법이 나오면 맥을 못췄다. 그래도 국어 부장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고, 2층 교무실부터 5층 교실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컴퓨터를 들고 오갔다. 


 “선생님. 저는 나중에 뭐가 될 거 같아요?”
발꿈치를 들고 걸으면서 진수가 묻는다. 그렇게 걸으면 조금이라도 커 보일까 싶어서.

“너는 이미 성실하고 예의 바른 사람인데, 공부하는 이유가 그런 사람 되려고 하는 건데, 그러니 너는 이미 멋진 사람이야.”

 

진수는 졸업을 했다. 신년회에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가 실족하여 물에 빠졌고 저체온증으로 끝내 숨을 거뒀다. 무엇이 될 거 같냐고 물었을 때, 너는 이미 멋진 사람이라고 말해준 것이 천만다행이다. 국어 부장 일을 성실히 하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아이라고 말해준 것도 감사하다.


다시 나의 기도를 정돈해 본다. 복도 짓지 않고 복을 내려달라는 얼토당토한 소원은 빌지 말자. 삶은 고해이나 파도 사이사이에 놓인 쉼을 알아차리면서 노닐 듯 산다면 삶이 고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일이 고되어도 그 사이에 아이들을 기억하고 되살리며 기록해주는 일! 미루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말해주는 일! 그것이 나의 소원이다.

의정부 효자고 교사 박희정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9>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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