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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전공이 무엇이오? ”

2023년 4월호(16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2. 1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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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전공이 무엇이오? ” 

 

가끔 40년 교직 후 정년퇴직했다고 말하면 무슨 과목 선생이냐 묻는다. “당신 전공이 무엇이오?” 하고 묻거나 “무슨 과목 가르쳤나요?” 라고 물으면 즉답하기가 망설여진다. 국어, 영어, 수학도 아닌 그렇다고 음악, 미술도 아닌 터라 말하기가 무척 애매하다. “무슨 과목 선생처럼 보이냐?”고 되물으면 그 답 또한 다양하다. 세 과목을 가르쳤으니…

학생들에게 가정과목과 컴퓨터수업을 15년씩 30년을 하던 중 내 의지와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2008년부터 퇴직 전까지 나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직업과 진로’라는 과목을 10년 가르쳤으니 즉답하기 어려울 수밖에. 

내가 직업과 진로라는 과목을 가르치게 된 사연의 시작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이건 내 의지와 달리 위에서 하라고 하니 평교사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직업과 진로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교내에는 진로 상담교사(부장급)를 하겠다고 진로 연수를 받은 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더러 진로 수업을 하라니 당황할 수밖에… 진로라는 과목은 출제나 시험이 없이 ‘수우미양가’의 평가가 아닌 ‘이수 & 미이수’의 선택만 있는 과목이다. 관리자의 최후통첩은 30년 경력 교사를 졸지에 시간 강사로 만들었고 딱 양쪽 날개 잘려 날지 못하는 새가 된 기분이었다. 위의 절대 부당한 처사라 얼마든지 불복종할 수 있었지만, 컴퓨터실의 낡은 시설로 웹디자인과 그래픽 수업할 상황은 그리 녹록지 못했다. 

처음엔 너무 억울하여 이에 불응해 나의 이 상황을 이야기하고 명퇴할까 했지만, 그동안 몸담았던 학교의 명예를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았으니 이때 속앓이하며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진로 과목 시작 1년은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라 어렵고 힘들고 억울하다는 생각에 다시 전산 관련 수업을 할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1년 동안 진로 수업을 하고 보니 웬걸 정말 드디어 딱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진로’라는 교과목의 전공 연수는 단 한 시간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이후로도 일부러 받지 않았다. 교육부에서 생각하는 틀에 박힌 진로 수업은 하고 싶지 않아서 철저히 거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설계한 진로 교육과정이 있었으니 관에서 주도하는 진로 교과서나 수업 지침서 같은 건 전혀 필요가 없었다. 난 고정된 사고로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 가르치고 싶지 않았고 두 아들의 엄마로서 경험과 청소년 심리학으로 채우고 싶었다. 덧붙여 잘하는 것이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라서 학생들에게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문서작성과 디자인 편집 정도는 잘 할 수 있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이렇게 나의 진로 수업은 컴퓨터실에서 계속됐다. 전문적인 지식 전달보다 30년을 여고에서 근무한 노하우로 진로 수업에 임했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는 엄마의 심정으로 청소년들의 진로를 염려하면서 시나브로 진로라는 과목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학생들도 본관(양림동)과 컴퓨터실 간(백운동)의 거리가 꽤 됨에도 나의 수업 철칙인 ‘5분 전 입실, 정시 수업 시작’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교사 평가가 없는 과목이니 대입을 앞둔 학생들이 대충할 것 같은데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아니었다.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실 수업이니 가끔 헛짓하는 학생들은 있어도 잠을 자거나 수행할 일을 게을리 하거나 안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평가가 없으니 “아가들~~ 대충해도 괜찮아”라고 말을 해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청소시간까지 와서 맡은바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을 수행했다. 인문계 고교에서 다른 과목에 피해가 될 수 있다며 전원을 차단하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요즘 학생들의 세태로 선생님들이 고민할 때 “진로 수업 시간에 잠자는 학생들 없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주로 진로 수업 시간에 자기 적성과 흥미, 가치관 그리고 장래를 생각하는 글을 많이 쓰게 했다. 컴퓨터 실 안에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검색하고 장래 직업을 생각하며 꿈을 키웠다. 자기 꿈의 대상인 롤 모델을 찾아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체험으로 먼저 메일을 보내고 답장 받고 발표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 대단했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꿈을 가진 청소년들의 질문에 꼼꼼한 도움의 글을 주신 분들의 답글을 친구들에게 모두 공유(온라인 학습장)했다. 담당 교사로서 귀한 답글을 주신 모든 분의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훌륭하고, 감사했다. 인생 주기에 맞는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꿈이니 허황하고, 허황한 꿈도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대단히 멋졌다. 자기 생각 글을 정리하는 키보드 소리가 잘~ 잘~ 잘~ 거리면 어찌나 학생들이 기특하고 뿌듯한지 수업하는 시간 내내 나도 행복했다. 출생의 비밀, 성장 스토리, 자신의 인생 롤 모델, 인생 버킷리스트 작성하기 등등 진로라는 과목과 나의 교육철학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1년간의 수업을 마치면 자신이 직접 작성한 자기 적성과 진로, 직업에 관한 생각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됐다. 솔직히 나의 이런 진로 수업자료와 학생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당시 주변 학교 선생님들이 탐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업 때마다 감동과 칭찬을 아끼지 말걸, 그땐 내가 너무나 엄격한(아이들 표현은 무서운) 선생이었음을 지금 반성한다. 게다가 대면 학습이긴 해도 컴퓨터라는 장비가 가운데 가로막혀 사제 간의 깊은 정을 나누기엔 한계가 있었다. 선생 말 한마디를 놓치면 따라올 수 없는 활동이라 틀리면 선생의 레이저 눈총을 받아야 하니 아이들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괜찮아~~ 그냥 포기해”라고 말하면 “포기란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도 그때 학생들에게 배웠다.

학생들이 50분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하루 진이 다 빠진다는 말을 듣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에게 맡겨진 수피아여고 학생들이 어찌나 착하고 고마웠던지 지금도 자동 고개가 숙어진다. 칠팔십여 개의 두 귀 쫑긋, 두 눈 똘망한 학생들의 그런 열정이 나를 정년퇴직 때 까지 있게 했다. 평가권까지 박탈당하며 억울하게 맡게 된 교과목 ‘진로’가 전공 공부를 하고 가르쳤던 ‘가정’과 ‘컴퓨터’수업보다 짧았지만, 내게는 진로라는 과목을 함께한 시간이 진정 값지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좀 더 친절할 걸 그땐 그리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아그들아~~ 
다들 지금도 본인들의 생각 글쓰기는 잘하고 있는지… 고맙다 아그들아~~
어디서 뭘 하든 감사한 마음으로 잘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아그들아~~
너희들을 만나면 ‘우리 행복하게 살자’며 내 생각 글의 책을 꼬~옥 두 손에 얹어 주고 싶다. 

인생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출제 부담도, 평가에 대한 부담도 없어져 버린 그때 그 시절. 이때부터 방학 때마다 전공 연수를 하는 대신 해외여행을 다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로 과목을 시작한 다음 해 2009년 1월부터 나 홀로 세계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나 역시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내 삶의 색깔이 달라졌다. 인도여행은 나의 인생행로를 바꾸는 순간이었고 지나고 나니 얼마나 잘한 결정인지 알게 됐다. 학생들에게 그때도 말했고 지금도 말하지만 지치고 어려울 때 ‘인도로 여행을 떠나보라.’고 한다. 어느 과외를 시킬까 고민하는 학부형들이 내 자식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까를 고민해 주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서울대 몇 명 넣을까 생각보다, 학생들의 인생을 염려하는 관리자가 되길 바랐다. 어학연수는 외국어를 배우러 가기보다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써먹느냐의 문제다. 인도로 여행은 이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고 이보다 중요한 ‘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난 내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에 인도를 여행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자는 맘을 배웠다. 인도는 베푸는 자가 서서 돌면서 나누고 거지가 앉아서 받는다. 어느 님의 말처럼 ‘라면 한 그릇도 성찬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인도다. 꼭 인도가 아닐지라도 ‘집 떠난 여행은 내 집이 제일 편한 곳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내가 진로를 가르칠 때 최종 학습 목표는 ‘지금 행복해지자.’라는 것이었다. 감사할 줄 알아야 그 순간 행복해진다.

 

《기적의 순례와 여행》,《인도여행의 한 수》의 저자 정금선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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