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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 나고야(名護屋)성을 답사하며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1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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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큐슈]


황성 옛터 나고야(名護屋)성을 답사하며

 

히젠의 나고야성을 아시나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입니다. 가라쓰唐津의 히젠이란 마을에 히데요시의 고향인 나고야名古屋와 같은 이름을 따서 만들되 자만 자로 바꾸었습니다. 큐슈지방에 수많은 항구도시가 있었음에도 왜 일게 촌락에 불과했던 히젠을 택했을까요? 무엇보다 지리적인 이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대마도를 거쳐 부산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곳이며, 바로 앞에 가베시마加部島, 가카라시마加唐島라는 섬이 북풍을 막아주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정박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지닌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히데요시는 히젠에 나고야성을 축성하고 반경 3km 내에 조선 출정을 위해 전국의 다이묘들과 군사들을 불러 모아 집결시켰습니다. 이 때 모아진 군사만 130개 진영의 158,700명에 달합니다. 이때 각 다이묘들은 고유의 문양을 사용한 깃발로 서로의 진영을 구분하였습니다. 일본 성에서 산꼭대기에 위치하는 가장 핵심 건물인 천수각에서는 주변에 배치한 수많은 군사진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배들의 출입과 바로 앞 섬들과의 교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입하는 배에서도 멀리에 위한 천수각의 위용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어 히데요시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듯 싶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전국에서 모은 158천의 군대를 이끌고 임진(1592)년에 1차 조선침략을 감행했으나 실패로 끝나자, 다시 14만 명의 군대로 정유(1597)년에 2차 침략을 시도하지만 역시나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1598년에 히데요시가 죽자, 7년의 조선침략 전쟁은 끝이 나고, 이 때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군에게 히데요시의 자랑거리인 히젠 나고야가 아닌 후쿠오카의 하카타 항으로 철수를 지시합니다. 그후 히데요시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있는 나고야성을 의도적으로 폐허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래서 현재의 나고야성에는 건물은 간데없고 빈터만 덩그러니 남아서 그 때의 자취와 위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히젠이 조선침략을 위해 번개처럼 모여든 사람들과 상인들에 의해 일본열도에서 손가락에 들어가는 융성한 도시가 되었다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역사 속 초라한 마을로 돌아간 거지요. 긴 칼을 옆에 차고 으스대며 거리를 활보했던 다이묘들은 자신들을 상징하던 문양 속으로 사라졌고, 나고야성의 웅장한 위용과 역사는 히젠 나고야성도 병풍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울분과 한의 땅, 큐슈

임진왜란 때 집결한 군사 중에 조슈 번을 비롯한 큐슈지역 군사만 세어보면 82,200여 명에 달합니다. 이는 전체의 절반을 웃도는 숫자입니다. 숫자로 보면 당시 큐슈지역 거의 모든 번들의 군대가 참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큐슈지역만 유독 많이 참가했을까요? 큐슈지역은 고대부터 한반도에서 농사를 비롯한 철기문화와 각종 문물을 전수받았고,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일본의 지배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고대, 중세, 근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본의 뿌리와 같은 곳입니다. 특히 7세기 후반 백촌강(백강)전투에서 백제 구원을 위한 27천여 명이라는 대규모 파병도 바로 여기 큐슈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패한 호족들과 한반도에서 쫓겨난 백제의 지배층들은 울분과 한을 가지고 큐슈에 정착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백촌강 전투를 전후해서 일본열도로 건너온 백제인만 20여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그 연관성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현재의 일본 지도층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요시다 쇼인은 조슈 번의 군사학 가문 출신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수많은 주요 인물들이 쇼인의 직간접 제자들인데, 멸망한 백제의 원한과 관계될까요? 관계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때린 자의 역사에는 맞은 자의 슬픔의 역사는 없다

나고야성터 옆에는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세워져서 나름 그 때의 사료들을 전시해놓았지만 우리가 궁금해 할 내용들은 표기를 하지 않거나 유독 일본어로만 표기해 놓았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도 文綠·慶長(분로쿠·케이쵸의 역)’ 밑에 작게 표기했고, “ ... 히데요시가 분로쿠 원년에 각 다이묘들에게 명령해서 조선 침략을 시작했다 ... ” 라며 아주 간략하게만 기록합니다. 때린 사람의 입장에서 쓴 역사기록에는 맞은 사람의 고통과 슬픔의 역사는 자리할 곳이 없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나라인 일본, 피로는 한 형제일 것이지만 너무도 달라져버린 그들과 우리는 어떻게 21세기에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까요?



 

추광재

iryatyahweh@gmail.com

 

황성의 달

荒城


1

春 高楼

봄날 고루한 꽃의 향연

かげさして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千代わけでし

천년송 가지 사이로 비치는

いまいずこ

그 옛날의 빛은 지금 어디에

 

2

秋 陣營

전쟁터의 가을에 서리 내리고

數 見せて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수를 헤아리며

うる りそいし

짚고 선 검에 비추이던

いまいずこ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3

今 荒城 夜半

지금 황폐한 성터의 밤하늘에 뜬 달

らぬ  たが ためぞ

변함없는 저 빛은 누구를 위함인가

るは ただ

성곽에 남은 것은 칡덩굴뿐

うは ただ

소나무에게 노래하는 것은 바람뿐

 

4

天上 影 らねど

자연의 모습은 변함없지만

榮枯 姿

영고성쇠 변하는 세상의 모습

さん とてか も なお

비추려 함인가, 지금도 역시

嗚呼 荒城夜半

아아 황성의 밤하늘의 달이여


일본에서 사랑받는 명가곡 중의 하나로, 1901년 천재작곡가 타키 렌타로(瀧廉太郎)가 작곡하고

시인 도이반스이(土井晩翠)가 가사를 붙인 곡.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9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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