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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 전투

2018년 6월호(제10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6. 2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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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지평의병, 지평리 전투 기념관을 다녀와서]


지평리 전투! 



 여러분에게 한국동란은 어떤 사건인가요? 그저 지나간 혹은 단지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역사일 뿐인가요? 그렇지만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족들 중에 이 역사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3년 동안 이 땅에서 처절하게 싸웠던 사건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런 일이 강력한 주위의 강대국(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지금이라도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이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동란이 어떻게 일어났고 아직도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한국동란을 제대로 회상하는 하나의 방법은 전쟁 중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전투를 바로 전쟁이 일어났던 6월 달에 회상해 보는 겁니다.


 ‘지평리 전투’! 여러분은 들어보셨나요? 6.25때 사람이 무기인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가운데 벌어진 유엔군의 완벽한 승리인 3일간의 전투이죠. 만약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서울과 남쪽 부산까지 한 번에 점령당할 뻔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지평리였다고 합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청춘을 죽음으로 불사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준 분들을 생각함과 동시에 지평리 전투에서 4명의 중요한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바로 한국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계급도‘중장’에서 4등급이나 낮춰‘중령’으로 참전한 프랑스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 미군 제23연대장 프리먼 대령, 리지웨이 미 제8군 사령관, 제5기병 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입니다.


         

지평리전투의 핵심 몽클라르 중령과 프리먼 대령



전투 개관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그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지평리를 포위한 중공군 6개 연대의 집중공격을 전면‘고수방어’로 막아낸 전투입니다. 전선 우측의 국군 제3·8사단이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밀려 철수함에 따라 이 전투에서 미23연대는 중공군 제39군에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대와 함께 고립된 상황에서도 전면 방어태세로 전환해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3일 동안 막아냈습니다. 

 지평리 전투는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 이후,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공세를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한 전투였으며,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4차 공세에 실패하게 되었지요. 유엔군은 재 반격의 기틀을 다지고, 이후 중공군의 공격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38도선 회복을 위한 반격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 예비 상황 

 제4차 공세를 준비하던 중공군은 유엔군의 지평리 지구와 국군의 횡성지구 중 전투력이 약한 국군을 먼저 공격하여 와해시킨 후, 계속해서 유엔군의 지평리 지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51년 2월 9일 중공군 제39군 제115,116사단과 제40군 제119,120사단, 제42군 제126사단이 지평리 지구의 유엔군을 공격하는 부대로 결정되었지요. 이들 공격부대의 임무는 중공군 제39군이 먼저 지평리로 진출해 미군을 감시 견제하고, 제40군과 제42군 병력이 제39군의 지휘 하에 지평리의 미군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12일 저녁 지평리로 통하는 모든 기동로를 차단하고 2월 13일 아침부터 지평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습니다. 중공군이 지평리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미 제10군단은 한때 제23연대를 지평리에서 철수시키는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제8군 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평리 사수 명령을 하달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 제23연대가 지평리에서 철수하게 되면 이를 점령한 중공군이 여세를 몰아 여주~평택선으로 진출하여 미 제8군의 주력을 포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미8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제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지평리 사수를 결심하고 제1대대가 북쪽 207고지의 남단, 제2대대가 망미산 하부 능선을, 제3대대가 동쪽 212고지 동남사면을, 프랑스 대대가 서쪽 분지의 논 가운데와 양평으로 향하는 철도변을 각각 분담하고 방어진지를 강화하여 다가올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작전 환경

 지평리는 중앙선 열차가 통과하며 원주~문막, 여주~이천, 양평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주위의 280m 내외에 이르는 여러 개의 고지를 연결하여 직경 5km의 사주방어를 편성하기에 적합했죠. 그러나 당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 5천 600여 명의 병력이 담당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했으므로 미 제23연대장은 진지를 축소시켜 마을을 중심으로 1.6km의 원형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연대에 1개 중대와 각 대대에 1개 소대만 예비병력으로 남기고 전차를 포함한 전 병력을 방어진지에 배치했습니다. 또한 참호를 더욱 깊게 구축하고, 다량의 대인지뢰(사람의 무게가 가해지면 터지도록 설계된 폭발물)와 조명지뢰(지뢰의 내부에 발광 물질이 충전되어 있어 점화가 되면 일정시간 동안 조명을 제공하는 지뢰)를 매설하였지요. 작전기간에 기온이 영하 15℃까지 내려갔으며, 강한 바람 때문에 병사들의 체감온도는 영하 20℃를 넘었습니다. 



지평리로 향하는 미 제5기병연대


전투경과

1) 중공군의 공격개시 

 1951년 2월 13일 밤, 지평리를 포위한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박격포와 포병으로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새까만 개미 떼처럼 아군을 향해 공격해 왔습니다. 중공군 특유의 경적, 호각, 나팔소리가 연대의 전 방어선에서 밤새도록 울려 퍼졌지요. 지구 반대편 이역만리에서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의 장병들에게 지평리의 밤은 너무나 길고도 처절했습니다. 

 중공군은 미 제23연대 진지의 사방에서 횃불을 들고 포위망을 압축하기 시작했지요.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격은 2월 14일 아침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날이 샐 때까지 미 제23연대의 손실은 약 100명에 달했으며, 연대 지휘소 주위에 중공군 포탄이 떨어져 군수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다리에 박격포탄의 파편을 맞아 부상당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유엔공군 전폭기가 진지 남쪽 망미산 일대에 집결한 중공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중공군은 간헐적인 박격포 사격에만 의존하면서 주간공격을 단념하고 야간공격으로 전환했습니다.


2) 중공군과 유엔군의 처절한 혈투

 야간 공격으로 전환한 중공군은 14일 20시 30분을 기해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 방어진지 전면에 공격을 재개하였습니다. 전날 2개 사단이 동시에 공격하여 실패한 중공군은 이날 밤 새로이 2개 사단 규모를 추가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지요. 중공군은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지평리를 반드시 확보하여야만 했기 때문에 무모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이 보유한 화력은 미약했지만‘인간’이라는 무기는 넘쳐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 앞에 중공군은 속수무책이었죠. 

 유엔군의 포병과 박격포 세례에 살아남은 자는 지뢰지대에서 죽고, 지뢰지대를 벗어난 자는 철조망 앞에서 기관총에 쓰러졌습니다. 특히 남쪽의 제23연대 제2대대 지역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일부지역의 진지 내에서는 중공군과 백병전으로 맞서는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죠.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갔으며 지평리 외곽의 진지 전방에는 이날 밤 사살된 중공군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습니다. 


3) 미 제5기병연대의 연결작전 

 2월 15일 07시를 기해 미 제5기병연대는 미 제23연대와의 연결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정오가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고 난관에 봉착한 제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은 전차 위주로 특수임무부대(TF)를 편성해 곡수리에서 지평리까지 6km의 거리를 돌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차종대는 전차 간에 50m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선두와 후미 간의 길이가 1,500m에 달했으며, 전차의 전진이 지체되면 보병이 하차하여 통로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연대장이 중단 없는 전진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차한 보병이 다시 탑승할 여유도 없이 전차가 출발함으로써 남겨진 보병은 적진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지요. 또한 전진 중인 전차 역시 적의 사격이 치열해 몇 번이나 정지하여 양쪽 고지의 적을 제압하려 했는데, 그때마다 군인 기질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크롬베즈 대령은‘정지하면 절대 안 된다. 달리면서 사격하라’라고 강경하게 명령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제5기병연대가 제23연대와의 연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망미산 아래와 좌측 248고지 사이를 반드시 뚫어야만 했습니다. 특수임무부대는 선두 전차가 협로 입구에 들어서자 중공군의 박격포와 로켓포가 집중되어 그 중 한발이 전차 포탑에 명중하여 전차 승무원이 전사하는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5기병연대는 2월 15일 17시 15분에 지평리 남쪽의 망미산을 공격 중인 미 제23연대 전차와 연결에 성공하였습니다. 

 망미산에 배치된 중공군은 결국 미 제5기병연대의 증원으로 사기가 저하되어2월 15일 17시 30분에 지평리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퇴각하였습니다.



지평리와  원주 전투에서  포로된 중공군들


지평리 전투의 객관적 평가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유엔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또한, 미군과 프랑스 대대가 연합하여 유엔군 상호간의 협조로 전세를 역전시킨 최초의 전투이지요.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유엔군의 사기와 전의(戰意)를 진작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평리 전투에서 사살된 중공군은 4,946명으로 추산됐고, 78명이 생포되었으며, 유엔군은 52명의 전사자와 259명의 부상자, 4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프랑스 몽클레어 중령은 곧 태어날 아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참여했습니다. 그의 딸인 파피앤드가 2010년 10월 1일 아버지를 기리고 있는 지평리 전투 전시관을 찾았고 작년 11월에 별세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휴일임에도 지평리 전투전시관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농사일을 잠시 접고 버선발로 나와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신 지평리 토박이‘정운학’실장님의 사명감 있는 모습에 감동하면서, 지평리 전투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평의병 및 지평리전투 기념관’리노베이션이 5월 8일~6월 30일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 새롭게 단장한 지평리 전투전시관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이 땅의 역사에 대해 더욱더 관심을 갖기 바랬습니다. 정작 알아야 할 우리들의 방문보다 작년에 중국 사람들이 1,500명 방문했다며 아쉬움을 전하는 정운학 실장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 했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

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 

031-771-6625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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