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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올리는 편지

삶의 스토리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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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편지]

봄에 올리는 편지

 

 

  “아버지, 어머니!” 깍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면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싫어하시겠지요? 저 역시 같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앞으로도 쭉 철없는 아이마냥 “아빠 엄마!”라 부를 작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예전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말이죠. 

  이 세상에는 정확히 셈하거나 함부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하늘의 높이가 그러할 테고 바다의 깊이가 그러하겠죠.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도 분명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은 그 품이 얼마나 포근하고 넉넉한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요. 훗날 제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좁디좁은 제 품도 두 분의 그것처럼 넓어질 수 있을까요? 내 품안에 나 아닌 존재를 꼭 끌어안을 수 있을까요? 숱한 자식이 그러하듯 저도 어버이의 내리사랑은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결혼해 엄마가 되어도 좋은 나이에 이르고 보니, 내가 당연히 베풀어 주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두렵고 무겁고 어려운 일임을 깨닫습니다.

  부모님 품에서 자라는 동안 큰 소란을 일으킨 적은 없지만, 돌이켜 보면 의외로 제멋대로인 딸이었습니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는 웬만해서 고집을 꺾지 않았으니까요. 사범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엄마가 바라던 교사의 길은 결국 걷지 않았죠.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요. 3년 전 결혼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른들의 예상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해버려서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하셨을 거예요. 신랑과 신부의 가까운 손님만을 초대한 작은 결혼식이라고 말들 하면, 도대체 양가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했느냐며 주변에서 신기해했지요. 그렇지만 두 분은 저의 계획과 선택을 늘 믿고 동참해 주셨어요. 염려는 하시긴 해도 반대는 하지 않으셨죠.

  2015년이었나요. 1년여의 호주여행기를 엮어 독립 출판 형태의 산문집으로 발간할 무렵,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아담한 카페에서 열었던 사진전으로 기억합니다. 머리칼을 헝클이던 바람의 감촉이 오늘처럼 부드러웠으니 아마 봄이었을 겁니다. 두 분은 전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다녀가셨죠. 그날은 웬지 기분이 조금 묘했어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외려 태연했는데, 부모님 앞에 어떤 결과물을 내보이려니 괜스레 쑥스러워지더군요. 벽에 걸린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둘러본 아빠는, 이런 말을 방명록에 남겨 주셨어요. ‘앞으로도 너의 세계를 우리가 마음껏 여행할 수 있도록 해 주라.’
 

  “아빠 엄마. 언제까지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딸의 세계를 마음껏 여행해 주세요. 그 여정이 지루하지 않도록 저도 삶을 성실하고 흥미롭게 꾸려 나가겠습니다.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여행이 전개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뜻밖의 순간마저도 기꺼이 저와 함께 즐겨 주실 거라 믿어요. 그리고 가끔은 제게도 두 분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딸의 작고 사소한 성취를 늘 크고 귀하게 칭찬하셨던 아빠 엄마의 응원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보다 훨씬 주저하고 망설이는 어른으로 자랐을 거예요. 딸의 문장을, 딸의 생각을, 딸의 세상을 항상 따뜻하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부모님을 향한 공개적 러브레터가 되어버렸지만, 여기 담긴 마음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롯이 두 분의 가슴에 와 닿길 바랍니다. 이 편지가 종종 꺼내 읽고픈 봄날의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네요. 눈부신 계절이 지나기 전에 사위와 함께 뵈러 갈게요. 올해도 꽃구경 가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영주

meproject@naver.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1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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