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생애 최초 장기휴가 중!

삶의 스토리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29. 08:36

본문

[삶의 전환 스토리]

생애 최초 장기휴가

 

  저는 26년차 직장인입니다. 주말이 끝나는 것이 싫고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일반적인 직장인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과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가 원하는 곳에 지원해 입사시험을 통과하고 제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회사가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왔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요?

 

  그런데 저는 지금 생애 최초의 장기휴가 중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병으로 인한 휴직상태죠. 지난해 말 ‘뇌종양’ 판정을 받고 15시간 수술을 받았습니다. 올해 6월 말에 2차 수술이 남아있습니다. 처음엔 저에게 벌어진 이 일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열심히 살아온 죄 밖에 없는데... 내 능력의 200%를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는데...

 

  수술하기 위해 병원과 의사를 결정하고, 각종 검사를 받고, 입원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저의 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였습니다. 막상 수술날에는 이미 많은 생각을 정리한 뒤여서 오히려 담담하게 수술대에 누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중학생 이상이 되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만큼 개인이 가진 생각, 신념, 가치관 이런 것들은 그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어서 쉽게 변할 수 없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 경험으로 생사를 넘나들 만큼의 사건이나 인생을 바꿀만한 충격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그건 예외다 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전 저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동동거리는 생활을 연속적으로 이어왔습니다. 회사 다니고, 아이 키우고, 대학원을 다니며, 직업과 관련해서 주 3~4회는 공연이나 전시를 다녔습니다.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고, 모임에 참석하고, 각종 미팅을 하고... 그러다 보니 평균 수면시간이 3시간 반~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죠. 젊고 체력이 허락할 때는 이 모든 일정들은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이렇게 모자라는 시간을 쪼개가며 발전하려 노력하는데 시간을 헛되이 쓰거나 자기개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높아졌고, 업무를 하거나 사회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깊은 실망을 느끼곤 했지요.

 

  가족들은 나의 절실함과 부지런함을 놀라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담스러워했으며, 가족을 위한 시간부족으로 자신들의 생활이 불편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적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 분, 초 단위로 계획에 따라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매번 계획에 맞추기 위해 재촉하고 여유없는 하루하루를 총총거리며 이어갔었지요.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한 달 후 약속까지 미리 정해져, 나를 위한 한 나절의 시간도 쉽게 할애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일상 속에 많은 일을 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제 삶의 질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저는 점점 예민하고 까칠한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어느날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영화나 TV주인공들이 걸리는 병으로만 알았던 ‘뇌종양’이 저의 머릿속에 자라고 있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아들이기까지 저는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수술을 끝내고 병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자고, 주사 맞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였지요. 이렇게 갑자기 저에게만 주어진 엄청난 시간들이 당혹스러웠지만, 머릿속을 비울만큼 잠시 동안의 여유도 갖지 못한 생활을 꽤 오래 해 온 저에게 그 시간들은 오히려‘축복’이라 여겨졌습니다.

 

  우선 제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수술 후의 회복’이었습니다. 병에 따른 증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꽤 규칙적인 운동을 계속해왔던 저는 수술 후 회복이 빨랐고 예후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생활 끝에 이런 병이 생겼다는 것은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휴직기간동안 내가 살았던 생활방식과 식습관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꿔야만 했지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명상을 하고, 6km씩 걷는 운동을 하며 오전, 오후 요가를 두 번씩 했습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가벼운 책을 읽으며, 때때로 공연을 보기도 하면서 잠들기 전에 반신욕으로 숙면에 도움을 주려합니다. 저장음식보다는 싱싱한 제철음식을 그때그때 해먹고, 농약으로 키운 채소보다는 유기농이나 집에서 키운 채소들로 식탁을 차리고 있지요.

 

  집과 회사가 지척인데도 퇴근 후 미팅과 약속들 때문에 시간 절약이라는 이유로 자가용을 이용해 출퇴근 했었는데, 4개월여 운전을 하지 않다보니 이제 지하철 두세 정거장은 거뜬히 걸어 다니죠. 이렇게 걷기를 생활화하니 우리 동네 빵집에서 빵 나오는 시간이 몇 시인지, 미장원 문은 아침에 몇 시에 여는지도 알게 되었고 평소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이전과 다르게 살아보기에 방점을 두고 모든 것을 바꾸어가기로 했습니다. 수면시간 7시간 유지하기, 계획하지 않아도 조바심내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에 죄책감 느끼지 않기,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등이 요즘 제가 실천하고 있는 생활방식입니다.

 

  26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는 여전히 소중하고 제가 했던 일들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한 발짝 떨어져 생활해보니 그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또 다른 세상에는 흥미로운 일들도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어지럽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머리가 맑았던 적이 언제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병이란 것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머릿속 혹이 아니었다면 이런 삶들을 알지 못했을테니까요. 제 두 다리로 힘차게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것, 더 늦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묶고 오늘도 저는 상쾌한 봄을 느끼며 힘차게 걷습니다.

 

 

예술의전당 창의문화팀 팀장 손미정

mirha@sac.or.kr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1호 >에 실려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