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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메이지유신을 부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 마루야마 마사오의 학문에서 보이는 일본 스스로의 역사반성의 한계

2018년 8월호(제10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8. 12.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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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 사후연구 - 일본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인은 메이지유신을 부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 마루야마 마사오의 학문에서 보이는 일본 스스로의 역사반성의 한계





 1. 일본의 역사반성과 정체성, 그리고 사상가로서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은 우리에게는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특히 과거사 문제로 그렇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가 박근혜 정부 때 일본과 체결한 성노예관련 협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본정부가 반발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일본의 모습을 볼 때면 왜 일본은 역사반성을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단순히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평범한 일본인 개인들의 삶이 특별히 비양심적이진 않기 때문에, 이러한 추론이 별로 설득적이진 않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일본인의 역사반성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 양심이 있고 없고 라는 일차원적 차원이 아니라, 일본인의 다층적인 자기 정체성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우리는 ‘일본인이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일본인의 구체적인 행동과 태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깊이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의 정체성이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서 형성되었듯이, 우리가 보는 일본인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겹겹이 쌓인 역사를 통해 오래토록 다져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일본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속내를 뒤집어 까 보이지 않으므로 옆 동네 사는 우리가 일본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살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일본 역사 중에서도 최근의 역사인 ‘메이지 유신’과 이것과 관련되지만 이제는 과거의 사람이 된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를 통해 일본의 역사와 자기정체성, 그리고 역사반성의 문제를 다뤄보려 합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젊은 시절에 도쿄대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고, 전후 일본학계에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정치 사상계에서는 거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꾸준히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해오고 말년에는 천황제를 부정하여 언뜻 우리 입장에서는 양심 있는 학자라 평가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2. 일본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메이지유신의 중요성    


 한국인들은 1592년의 임진왜란은 잘 알지만, 을사조약(1905)과 한일합방(1910)의 원인이 된 메이지유신(1868)은 잘 모릅니다. 저도 몇 년 전까지는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운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단편적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인 일본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메이지유신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시대에서 근현대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바로 메이지유신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이를 기점으로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5),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9), 그리고 동아시아 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호주까지 연관된 태평양전쟁(1941-1945)까지 영토확장적 기세를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부터 일본 항복까지의 역사(1868~1945)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라는 한 마디 말이 그들의 시각을 대변합니다. 메이지 시대는 1868년부터 1911년까지 메이지천황이 통치하던 시기를 말하며, 쇼와 시대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쇼와천황이 다스리던 시기를 말합니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이렇게 보는 시각의 대표적 인물은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1923-~1996)입니다. 그는 메이지 시대는 영광의 시대인 반면, 쇼와 시대는 정신위생에 나쁜 시대, 발광상태의 시대라고 해석하여 두 시대를 철저히 단절시킵니다. 그는 메이지헌법의 삼권분립에 대해서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반면에 쇼와시대에는 군부가 무력으로 통수권을 장악하여 국가를 농간한 결과 일본을 패망으로 이끌었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지한파로 알려진 그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점은 경청할 만합니다만, 과연 일본의 근현대사를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의 이분법으로 보는 그의 시각이 맞을까요? 


 만일 우리가 일본의 2차 대전에 대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면, 이 대전을 일으켰던 근본 원인이 메이지시대에도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만일 일본이 제대로 역사반성을 한다면 2차 대전을 일으킨 역사를 비판할 뿐 아니라, 그들이 자랑하는 그 이전의 역사인 메이지유신에 대한 평가까지도 뒤집어야 합니다.  


 3. 마루야마 마사오의 쇼와시대 일본에 대한 분석과 한계

  

  3-1.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역사 비판 


 일본 패전 직후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1945). 이 논문은 전쟁 후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일본 사상계에 나아갈 길과 방향, 그리고 비전을 제시해주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 후 그는 일본의 학계와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해왔고 ‘학계의 천황’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논문에서 마루야마는 일본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처럼 전후 일본을 정신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을 했을까요? 


 마루야마 스스로도 일본의 참된 정신적 개혁을 위해서는 밑바닥부터 뒤집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논문을 통해서 일본사회의 본질적 병리 현상을 어느 정도는 진단합니다. 그는 일본을 2차 대전으로 몰고 갔던 현상을 ‘초국가주의’(혹은 극단적 국가주의, ultra-nationalism)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것(초국가주의)은 현재까지도 보이지 않는 그물로서 일본국민을 속박하고 있다. 전쟁을 위한 슬로건 같은 단편적 표현이나 현실의 발현형태를 통해 그 밑바닥에 숨어있는 공통된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통해 참된 정신의 변혁이 가능하다.” 


 그는 먼저 ‘건강한 민족주의’와 ‘극단적 국가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어서 그는 일본의 초국가주의는 전쟁의 동기가 더 강력하거나 더 노골적으로 발현되었다는 것 이상으로 대외팽창 내지 대내적 억압의 정신적 원동력에서 건전한 민족주의와 질적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정신적 원동력은 어떤 일시적 유행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본 국가구조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3-2. 일본에 있어 개인의 주체성문제 


 마루야마는 점진적으로 개인의 주체성이 확립된 서양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국가가 개인의 모든 삶의 윤리적 판단까지를 결정해주는 국가주의가 발현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의 기준은 개인의 양심이나 법이 아니라 얼마나 천황과 가까이 있는가의 척도가 된 것, 그리하여 자신의 이익을 천황의 그것과 동일화시키고 자신의 반대자를 곧바로 천황에 대한 침해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바로 일본의 병리라고 진단합니다. 


 이렇게 개인이 주체의식을 가지지 않고 천황이란 권위에 기대었기 때문에 2차 대전의 작전을 결정한 군의 최고통수권자조차도 전후 벌어진 전범재판에서 전쟁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똑같은 2차 대전의 전범국인 독일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전범재판에서는 실제 전쟁을 일으킨 결정권자가 아무도 없고 전쟁은 어쩌다 보니 일어난 것이라는 전혀 엉뚱한 진술만이 난무한 것이 바로 일본에 있어서 ‘초국가주의의 심리’라고 마루야마는 진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분석은 온전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인들이 천황의 권위에 기대어 사고하고 행동하며 결정하는 심리구조를 지녔다고 하여도, 역사의 주체로서 천황의 뒤에서 천황을 조종하며 역사를 주도하였던 어두운 실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루야마의 분석은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이러한 검은 실체를 가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일본 대중이 무주체의식이나 집단의식을 가졌다는 그의 분석에는 일면 동의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사를 주동했던 주체, 즉 천황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역사의 주동자들의 명치까지 마루야마의 붓끝은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루야마는 그저 1930년 당시의 군부 혹은 당시의 사회 전체에 집단적 책임을 돌릴 뿐이었던 겁니다.  


 3-3. 파괴적인 역사를 향한 주체는 있었는가?


 그런데 실제 그런 주체가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조선을 이어 만주를 확실하게 삼킬 계략으로 ‘만주사변’(1931.9.18)을 일으킨 자들은 만주에 파견된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소위 황도파)이었습니다. 이들 하급 장교들은 자신들을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과격파 지사들을 계승한 최후의 사무라이로 자처한 존재들입니다. 자신들은 천황의 통수권에 기대어 이러한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정치권이나 외교부나 심지어 군대의 (최)상급지휘관이라 할지라도 이런 행동에 반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동군 장교들의 주장에 일본의 각 신문과 국민은 관동군의 거사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만주로 파견되는 부대를 열렬히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주체들은 분명 존재하였고 그들은 바로 자신들을 진정한 사무라이의 후예로 자처한 하급 장교들입니다.  


 이들 하급장교들이 본으로 삼았던 사무라이들은 바로 조슈, 사쓰마, 도사번의 하급사무라이들로서 메이지유신(1868)을 만들어낸 주체들입니다. 이들 사무라이들은 당시 외세의 침입에 대해 무기력했던 막부에 대해 분노를 쏟아내며(토막, 막부타도) 동시에 천황에 대한 지지(존왕)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문서 조작, 암살, 테러와 같은 극단적이고 비정상적 정치행위를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막부를 종식시키고 천황통치를 확립하였으나 실제는 이들 사무라이들이 ‘존왕양이’, ‘천황제 복귀’라는 선전문구아래서 당시 15세 밖에 되지 않았던 메이지를 천황으로 등극시키고 뒤에서 철저하게 조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사무라이들의 이런 극단적 행동에 큰 영감을 주고 동기를 자극했던 ‘요시다 쇼인’과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같은 사상가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외적 행동 뒤에 정신적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들이 있었다는 거지요.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구원은 결연한 의지를 가진 사무라이가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자신을 불태울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일본의 국학을 집대성한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유교, 불교를 배격하고 천황과 일본의 고대신인 태양신(아마테라스 오미가미 天照大神)을 숭배할 것과, 일본의 천황은 태양신의 선택을 받았으므로 일본국민이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러한 사상이 막부말기의 무능과 미국 및 영국의 통상요구 등의 상황에서 사무라이들을 움직였고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동력이 된 것입니다. 


 3-4. 마루야마 마사오의 메이지 유신,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평가 


 마루야마 마사오 역시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의 사관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관을 기반으로 메이지유신 시대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명문인 와세다 대학의 설립자 이며 막부말기의 학자로 「학문의 권유」란 책에서 일신 독립해야 일국 독립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마루야마는 이 말을 ‘개인적 자유와 국민적 독립, 국민적 독립과 국제적 평등이 완전히 같은 원리로 관철되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그것은 일본 근대 내셔널리즘에서 아름답지만 짧았던 고전적 균형의 시대였다’라 평하였습니다. 당시 학계에서 선두의 위치를 차지하던 그의 후쿠자와에 대한 평가는 거의 대세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마치 후쿠자와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시민적 근대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제국헌법’(메이지헌법)을 완전무결한 헌법이라 극찬하고, 국가가 교육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법령인 ‘교육칙어’를 감읍할 정도로 환영한 인물입니다. 이런 교육에서는 마루야마가 주장하는 대로 개인의 존엄한 자유가 강조될 리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일본 내부의 불화를 치유하기 위하여 외부와의 전쟁을 일으켜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로 침략을 통한 발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입니다. 일본이 청국과의 전쟁을 과감하게 일으켜서 야만족인 청나라를 무력으로 눌러야한다고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지요. 자신 혹은 일본의 자유가 그처럼 중요하다면 마땅히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나라의 자유 역시 존중해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양심을 가진 자라면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내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를 빙자한 폭력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더 나아가 다른 큰 나라들이 일본을 향해서 동일한 주장을 하며 폭력을 행사한다면 일본인들은 과연 감사하면서 그 폭력적 통치를 받아들인 건가요? 


 그러므로 마루야마 마사오가 학계의 평가처럼 자유주의자로서 일본에 진정한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사람이라면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서 전면적인 부정을 하는 것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학자로서 양심 있는 일관될 모습일 겁니다. 그러나 그는 후쿠자와가 쓴 책의 일부분만을 참고하여 그것도 중요한 어구를 삭제하고 편집하여 마치 후쿠자와가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사랑한 근대주의자인 것처럼 포장해내었습니다. 일본에서 이러한 왜곡을 발견한 학자인 ‘야스카와 쥬노스케’는 마루야마의 말년에 이러한 사실과 자료를 전달하였으나 마루야마는 아마 당시 발병했던 병 때문인지 ‘잘 알겠습니다’라는 위선적인 말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야스카와 쥬노스케’는 마루야마가 평소에 ‘어디까지나 객관성을 지향하고 희망이나 의욕에 의한 인식의 흐려짐을 부단히 경계’하라 훈계하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런 마루야마가 자신의 도그마에 딱 맞는 부분만 지혜롭게(?) 인용하여 ‘후쿠자와 신화’를 만들어낸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그런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순진한 사람을 속였다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루야마의 문제는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가진 학문적 명성에 따라 현재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근현대사를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로 나누어 평가하는 잘못된 일본의 근현대사관을 현재까지도 극복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4. 결어-마루야마 마사오의 학문성 및 일본인의 역사비평의 한계  


 더 중요한 질문을 해 봅시다. 마루야마라는 일본의 걸출한 학자(?)가 과연 이러한 왜곡을 의식적으로 하였을까요? 설사 그가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무의식 혹은 본능적인 그 무엇이 이렇게 왜곡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철저한 ‘자기긍정의식’의 발로로 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과 동일시된 일본의 역사를 긍정하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이며, 자신의 무존재성과 철저한 공허함을 직시하기 싫어하는 인간(일본인)의 몸부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앞에서 말씀드린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정립한 국학의 본질을 닮았습니다. 일본만 특별하며 우수하기 때문에,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게 튕겨버린 철저한 일본중심적인 자아가 그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낭만적인 리버럴리스트(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겉은 자유주의자의 모습일지 몰라도 가장 깊은 곳, 중심의 모습은 그토록 처절하게 일본주의적이었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국가에서 최고라 인정받는 학자의 삶에서 남은 것이 이것이라니 참으로 인생이 순식간에 허무한 듯 지나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에서의 저의 시도는 현재까지 일본이 왜 그렇게 역사반성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한 사람의 학자를 통하여 제 나름대로 대답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저의 이러한 분석은 그가 쓴 모든 글이나 행적, 그리고 그 당시 일본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학자들의 평가 모두를 검토한 것이 아니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러한 왜곡과 자아의 편향됨과 중심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역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와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러고 보면 일본이 왜 역사반성을 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는 일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 본연의 문제, 인간이 어떻게 자기반성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반성은 자신을 긍정하려는, 자기 생존적 본능을 거스려 자기를 내려놓고 절대적인 기준아래 자기를 부정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기에 그토록 어려운 것일지 모릅니다.



법무법인신지 파트너 변호사 황경태
kt.hwang32@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6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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