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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1번의 영원한 교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2019년 3월호(제11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3. 21.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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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통신 노익호의 지휘자 이야기 8]

 

 

발라드 1번의 영원한 교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를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로 읽어냈다고 참 감동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예를 들어 쇼팽의 발라드 1번에서 4번까지 수록된 레코드판 한 장을 사면 연주자가 누구건 간에 개의치 않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입한 음반이 우연치 않게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판이었다면 그 판을 산 이상 다른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레코드판을 살 이유가 없었다는 겁니다. 듣고 또 듣고 그렇게 자꾸자꾸 듣다 보니 교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연주자가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는 사실에 크게 의미를 두는 해설가들의 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잘 치는데 더 잘 친다거나 더 별나게 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하며 그냥 들으며 행복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쇼팽의 피아노곡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로 고착되었습니다.

 

 

 

화사한 연주자의 등장


 그러던 어느 날 CD쟈켓이 밝고 화사한 노란색으로 채색된 ‘도이췌 그라모폰’이 나온 거예요. (성음사의 라이선스 판)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다소 무채색인 DECCA판과 달리 말입니다. 음악성이라는게 쟈켓과도 관련이 있는지 피아노 소리조차도 화사한 게 그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마우리치오 폴리니’였죠. 의리 참 좋아하던 제가 그만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야 할 지경이 된 겁니다. 얼마나 연주가 반짝거리며 빛났던지.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 한음 한음이 화음 속에 묻혀 뭉개지는 법 없이 말이죠.

 

쇼스타코비치의 매력을 가르쳐 준 지휘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가 베를린의 코미쉬오퍼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듣게 되었습니다. 음악에 심취하긴 했어도 직장생활에 전력 질주하는 동안 음악계의 변화에 둔감해졌었다고나 할까요. 아니,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어야 할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지휘대에 올라선 겁니다. 상당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이미 밝혔듯이 쇼팽에서 마우리치오 폴리니에게 화려한 폴로네이즈로 압도당한 아쉬케나지가 지휘대로 밀려 올라온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지휘자의 세계가 한 급 높다고 본다면 성공한 셈이지만) 사실, 유명 피아니스트가 지휘자로 시작할 때 누구나 우려의 눈으로 보게 마련입니다. 교향악단을 통솔해야 하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봐야하거든요. 저 유명한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의 경우도 지휘자로 나섰던 초기엔 비평가들 대다수가 “제발 피아노 의자로 돌아가 다오!”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때 바렌보임이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아들여 무릎을 꿇었다면 오늘날의 지휘자 바렌보임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니 가끔은 고집도 필요합니다.)
 아무튼 이 날 공연은 정말 열광과 환호 그 자체였습니다. 코미쉬오퍼에 모인 대다수 음악 애호가들은 아쉬케나지의 팬들이 분명했습니다. 교향곡의 마지막 부분에 팀파니와 함께 큰북이 8번 때려주는데 그 박진감과 벅참의 환희는 유럽 정통 교향곡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선연한 원초적 쾌락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같이 대동했던 화학도 이종헌씨는“관짝에 못을 쾅쾅 때려 박는 것 같았어요!”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자주 보게 된 아쉬케나지


 이후 아쉬케나지는 RSO(Radio Symphonie Orchester) Berlin 관현악단과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홀에서 정기공연을 자주 가졌기에 대여섯 번 더 그가 지휘하는 음악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볼 때 마다 느낀 특이한 점은 대단히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연주가 끝나면 양팔을 어디다 둘지 몰라 하면서 청중들에게 인사하는데 수줍음 많은 소년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세계가 평가절하 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높은 이상을 연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단원들을 다그쳐야 할 텐데 수줍고도 원만한 그의 성격으로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질 더러운 지휘자, 이걸 멋지게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라고 하겠지만 단원들은 이중적이라 자신들에게 혹독하게 군림하는 지휘자를 으뜸으로 쳐 주기도 하니 말 입니다.

 

아쉬케나지의 음악세계


 거실에 가구를 거의 두지 않고 산다는 품성의 단촐함이 곧 그의 음악세계와 관련지어집니다. 그의 음악을 채소로 빗대어 말하자면 청정 채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재임이 분명한데도 일반인들과 특별히 구분 짓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를 보면서 그의 음악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카라얀이나 첼리비다케와는 또 다른 무채색 카리스마!

 

발라드 1번으로 돌아와서
 영화 <피아니스트>의 영향으로 쇼팽의 발라드 1번은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덕택에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피아노를 좀 친다하는 친구들 모두가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치겠다고 도전들을 했지요.
 깊고도 깊은 첫 저음의 울림. 음울하고도 두렵고도 뭔가 알 수 없는 희망을 갖게 하는 그 저음. 시간을 잊게 만들었던 영화 속의 장면은 정식 음악 감상의 차원을 뛰어넘게 만들었더랬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쉬케나지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한판 승부. 누가 더 쇼팽답게 쳤는가, 음악성이냐, 기호의 문제냐를 떠나 다시 내 마음을 붙잡은 피아니스트는 누구인가! 나는 거꾸로 신었던 고무신을 다시 바로 신게 되었습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3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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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appytownculturestory.tistory.com/424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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