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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림을 그려라! 아들 김성원 화가가 들려주는, 순종의 어진을 그린 아버지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 이야기

2019년 3월호(제11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4. 14.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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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가는 화가이야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림을 그려라!

아들 김성원 화가가 들려주는,
순종의 어진을 그린 아버지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 이야기

김은호 화백 아들 김성원 화가

노숙자에서 어진화가*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좋으셨나 봐요. 붓글씨를 잘 쓰셔서 교회에서 광고문을 도맡아 쓰셨다고 해요. 그러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져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계동 현대자동차 사옥 자리의 집 한편에서 노숙하다시피 지내며, 이발소 잡부에서부터 제화 견습공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서울에서도 교회에 다니셨는데, 남루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를 눈 여겨 보던 한 분이‘재주가 아깝다’며 책방을 하나 소개해 주셔서 그곳에서 책을 필사하며 일하게 되셨죠. 
 요즘같이 인쇄술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어서 책을 일일이 베껴서 만들었는데, 좋은 글씨체로 일정하게 글을 쓰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죠. 이곳에서도 인정을 받은 아버지는 ‘그림을 배워보라’는 주변 분의 추천과 재정적 도움으로 이조 왕실에서 운영하는 ‘조선서화미술회’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죠. 그 학교는 당시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는데, 아버지는 그곳에서도 금방 두각을 나타내셨다고 해요. 그런데 때마침 이조 황실에서 순종 황제 초상화를 그릴 어진화가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당시의 화가들 중에는 세필로 똑같이 대상을 그릴 수 있는 북화(北畫)계열의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학한지 3개월밖에 안 된 아버지께서 당돌하게‘선생님 제가 그리면 안 되겠습니까?’하고 나섰고, 그 길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던 거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아버지의 위상이 한껏 높아지자 동문 했던 양반자제들의 시기와 질투는 말도 못했지요. 그 때부터 시작된 이런저런 모함에 아버지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순종의 초상화를 그릴 때, 하루에 10분 정도 얼굴을 보고 그것을 기억해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아버지의 솜씨가 대단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제자 양성을 통해 한국미술의 초석을 닦으신 아버지

 그 뒤로 당대 미술의 최고 자리에 오르신 아버지께서 가장 중점을 두신 일은 단연 제자들을 기르시는 것이었어요. 아버지께서 키워내신 제자가 100명 이상이나 되었는데, 등록금을 하나도 받지 않으셨지요.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며 자식처럼 키워내셨어요. 운보 김기창 화백을 비롯해 당대를 주름잡는 화가들의 80%가 아버지의 제자였습니다. 제자 중에는 시장에서 함지박에 과일을 팔다가 아버지의 눈에 띄어 가르침을 받고 유명한 화가가 된 분도 있었죠. 본인이 지독히 어려운 생활을 하셨고, 그 속에서 도움을 받아 그림을 그리셨기에 그 혜택을 고스란히 제자들을 향해 쏟아 부으셨던 것 같아요. 보통 스승이 되면 제자들에게 자기 스타일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개인의 개성을 살려 가르치셨기에 제자들의 그림 스타일이 전부 달랐죠. 그런 가운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아버지를 통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죠.


 아버지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길러 내실 수 있는 데는 어머니의 도움이 컸습니다. 희생정신의 넘버원이 어머니셨고, 너무나 지혜로우셨어요. 한 번도 아버지랑 다투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맡으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시는 분이셨죠. 저희 집 하루 식객이 30명이고, 거기에 제자들까지 있다 보니, 김치찌개 한 끼가 가마솥으로 하나였어요. 거의 식당 수준이었죠. 어머니는 미군담요로 만든 몸빼 옷을 앞뒤로 기워, 15년을 넘게 입으시면서 검소하게 집안 살림을 꾸려 가셨어요. 방황하는 저를 향해 “미안하다. 성원아”라는 말밖에 하시지 않았지만, 새벽마다 들려오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소리가 이나마 삐뚤어지지 않고 삶을 살아오게 한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여머리의 여인’(1952) 1935년경에 찍은 아내사진을 1952년에 그림으로 그리심


받은 것을 나눌 줄 아는 멋진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치르는데, 안면도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어려운 시절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분들이 문상을 오신 것이죠. 아버지는 돈에 욕심이 없으셨어요. 대신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멋진 분이셨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저금통장을 열어 봤는데 달랑 2만8천원정도 있더라고요. 그때 우리 아버지 그림 하나 값이 집 한 채 값이었는데 말이죠. 너무 서운하더라고요. 유서에는 나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다고 했는데, 달랑 2만원 밖에 없었으니까요.(웃음)


너무나 엄격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저에게 너무너무 엄격하셨어요. 본인이 최고가 되시고 너무나 많은 모함과 어려움을 당하셔서 그런지 저는 나대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죠. 그래서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오직 공부만 하게 하셨죠. 저는 운동에, 음악에, 미술에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는데 말이죠. 통금시간이 오후 6시였는데 친구들과 놀다 조금만 늦어도 지팡이로 때리셨어요. 그게 너무나 싫어서 중학교 때 몇 번이나 가출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아예 공부를 접고 모든 과목에 낙제점수를 받았죠. 일 년 동안 시험을 보면 이름만 적고 나왔어요. 전 과목 빵점은 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나중엔 창피해 학교도 가지 않겠다고 버티니까 아버지께서 조금 누그러지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버지처럼 예술가의 길을 준비하고 걷게 된 것이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려라!

 아버지께서 짧지만 제게 그림을 가르치시면서 주셨던 말은 ‘머리 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네 마음에 있는 것을 그려야지, 잘 그리려고 머리 굴려서 이상한 것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셨죠. 순수예술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흔히 그림에 그것을 그린 사람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머리 굴려 기교를 부리고 꾸미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죠. 아버지와 저는 그림의 장르가 전혀 다릅니다. 아버지는 인물중심의 사실적인 그림을 동양화로 표현했다면, 저는 서양화 중에서도 추상화를 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리는 초상화, 특별히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는 단지 외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인품까지 담아내야하기 때문에 참 힘들어요. 그래서 역사적 기록들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 성장과정 등을 철저히 공부해서 그림을 그리셨죠. 반면에 제가 그리는 그림은 저의 생각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관람자와 대화를 하는 것이죠. 나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꺼내 놓는 그림으로 관람자들에게 다가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인지‘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림을 그리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더욱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진화가 :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공식자격을 가진 사람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편집부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3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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