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이야기]
개그맨이 되기까지
어릴 적 조용한 성격이긴 했는데 할머니, 옆집 아줌마 흉내를 내면 식구들이 많이 웃으셨어요.“쟤는 저렇게 흉내를 잘 내냐”하시면서요.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 정말 웃겼습니다. 여자 친구인데 농구선수 서장훈을 닮고 거기다 웃기기까지 하니 숨어있던 개그의 끼가 발산 되어 친구들끼리“우리 20세가 되면 개그맨 시험보자”라고 할 정도였죠. 공부할 때는 솔직히 재미가 없었어요. 하지만 기타 칠 때나 레크레이션 할 때는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저를 좋아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레크레이션 학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공부할 때는 하나도 인정을 못 받았는데 마이크를 잡으니까 상도 받고, 장학금도 받고, 이 계기가 터닝 포인트가 되어 개그맨 시험을 보았습니다. 처음 개그맨 공채시험에서는 떨어졌어요. 심형래 선배님이 시험 감독관으로 들어오셨는데 제가 노란색으로 머리 염색을 하고 밀리터리복을 입고 있었거든요. KBS는 공영 방송으로 엄격한 분위기인데다“머리로 아이디어를 짜야 하는 네가 염색을 해?”라고 하시며 0점 처리를 하셨습니다. 여자 중에 정말 웃기는 애가 들어왔다고 했지만, 실패를 맛보게 되었죠. 하지만 실패를 하고 난 후, 엄마가 지원군이 되어주셔서 연기 학원을 보내 줄 테니 다시 도전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1년을 준비하고 2002년 24살에 KBS 개그맨 17기 공채 시험에서 대상을 받고 개그맨으로 정식 데뷔를 했습니다.
‘우비 삼남매’로 KBS 연예대상 개그맨 부문 신인상을 받다.
처음 개그맨이 되고 나서 네이버에 제 얼굴이 메인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대스타가 되었어’라고 했는데, 그것도 잠시, 희극인실에 들어가면 위계질서로 각을 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밥 먹으면 체하고 또 체했어요. 그만둘까도 생각했었죠. 제가 개미송을 불러서 들어왔기에 제 별명이‘개미’였는데“개미야~ 개미야~ 뜨뚱 타와”라고 하면 뜨거운 둥굴레차,“개미야~ 미둥”하면 미지근한 둥굴레차 선배들의 주문이 쏟아졌습니다.‘아~ 나 이럴려고 개그맨 된 거 아닌데 어떡하냐?’고민을 하며 눈물로, 기도로 견디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던 저에게 어느 날 갈갈이 박준형 선배님이 같이 코너를 해보자며 제안을 하셨고, 아이디어 회의를 하다가‘우비 삼남매’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만들어내기까지‘어떻게 하면 웃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모든 유머책들을 다 찾아 봤었죠. 그래서 여자인데도 아이디어를 잘 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고요. 이런 노력 끝에‘우비삼남매’로 KBS 연예대상 개그맨 부문 신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그맨의 길은 갈수록 어려웠어요. 결론을 내린 게 개인기만으로는 개그맨으로서의 한계가 있고, 기본적으로 연기가 뒷받침이 되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웠지요. 이렇게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 지금까지 개그맨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무대에서 놀자!’,‘뭐 안 웃으면 어때, 안 웃을 수도 있지’
축구에는 공격수, 수비수가 있고 수비를 잘 해줘야 공격을 한방에 할 수 있는 것처럼 개그도 그러합니다. 웃기려고 개그를 했는데 못 웃기면 그때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개그가 빵~ 터지는 순간! 데시벨이 쫘~악 올라가면서 관객들이 크하핫하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해냈구나. 뭔가를 해냈구나. 축구로 치면 1:0이 되는 설레는 순간이죠. 제가 3~5분 단타로 빨리 웃기고 탁 빠지는 콩트나 코믹극에 익숙하다 보니 한 시간 이상 해야 하는 연극을 할 때에 관객들의 반응이 없거나 웃지 않으면 등에서 식은땀이 납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에게‘안 웃겨도 돼, 그냥 너의 연기를 하면 돼!’라고 되 뇌이기도 하죠. 올해 2월 대학로에서 박미선 선배와 <홈쇼핑 주식회사>라는 코믹 연극을 하면서도 웃겨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어요. 하지만‘무대에서 놀자!’,‘뭐 안 웃으면 어때, 안 웃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고요.
18년차 개그맨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
갈수록 미디어 분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독해지는데 여기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버틴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견뎌낼 수 있는 나만의 비상구가 필요하지요. 예전에는 먹는 것으로 많이 풀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EBS에서 명로진 선배님과 같이 고전읽기를 진행을 하며 고전을 읽다보니 한 인간의 흥망성쇠가 거기에 다 나와 있더라고요. 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삶의 지혜도 생기고, 스트레스 상황에 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개그맨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개그맨이 나에게 주는 의미
‘권진영을 권진영답게’만드는 것이랄까요. 왜냐하면 저도 한때는‘개그 안할 거야. 나 연기할거야, 책 읽어주는 개그맨 될 거야’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너는 진지하면 안 어울려, 안 웃겨”하는 거예요. 제가 실없는 소리 하면 빵 터지고요. 최근에 한 <홈쇼핑 주식회사>라는 연극에서 감초역할인‘나대자’역을 맡았는데 계속 웃기는 상황들을 끌어가야 했죠. 역할을 맡고 대본 리딩이나 연습을 할 때 작가분들이 제게 한마디씩 하더라고요.“웃겨서 역할 맡겼는데 왜 이렇게 집사님처럼 변한거야”라고 말이죠.‘나에게 배역을 맡긴 이유는 옛날에 웃겼던 것을 기대하면서 배역을 줬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이언맨이 슈트를 입으면 날아 다니듯 저희 개그맨들도 가발하나 딱 쓴다거나 뭔가 장착을 하면 변하는 게 있어요. 생각도 달라지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 자신감에 좀 더 웃겨지지요. 저는 다시 결심했습니다.‘가발을 다시 쓰자!’집에 모아 두었던 가발 중, 제일 웃겼던 가발을 쓰고 대본 리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너 웃겨진다. 훨씬 좋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저“은갈치 바지 하나 해 주세요!”라고 요청도 하며 다시 무대를 날아 다녔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로 돌아가‘내가 개그맨에 왜 뽑혔지? 웃겨서 뽑혔지! 기본적으로 나는 웃겨야 해! 개그, 교양 구분 짓는 게 아니라 나는 개그맨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웃겨야 해!’이런 고민을 하며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개그 안 할 거야’라고 하다가 다시 개그 연극을 하면서, 역시 개그 할 때 제가 가장 빛나고 신이 날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보람도 더해집니다.
방송인, 개그맨으로서 힘들 때 이겨내는 힘
작년에 하나밖에 없는 고모, 이모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저는 웃기기 위해 무대에 서야 했어요. 제 분량이 끝나서 잠깐 옷 갈아입을 타임에 분장실에 들어오면 멍하니 있다가도 다시 제 차례가 되면 천연덕스럽게 웃겨야 했습니다. 많이 힘들었지만, 제가 제 마음을 컨트롤 못하면 프로가 아니잖아요.
또한, 연기자들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개그맨으로서 힘든 점이라면, 프로그램을 하나 맡으면 끝날 때가 있는데 어떨 때는 통보로 끝이 날 때가 있고, 프로그램이 갑자기 없어질 때도 있고, 쫑파티조차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보니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정을 많이 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요. 큰 기대를 안 하는 대신‘잘 놀았다’라며 끝맺음을 합니다. 이렇게 방송 세계가 치열하다보니 일을 하다가 슬럼프가 찾아올 때 많이 울었어요. 그러면서 잊고 해맑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인복 많다’라는 소리를 듣는데, 저희 언니가 멘토 역할을 아주 잘 해줬고요. 또 박미선 개그맨 선배가 많은 조언을 해 줬습니다. 그 외에도 좋은 분들과 대화를 하고 때로는 수다를 떨며 이겨낸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제가 결혼 3년차인데, 출산계획을 가져야겠죠. 나이가 있다 보니 어려움이 있지만, 노력을 해보려고 해요. 방송일은 꾸준히 할 계획이고요. 유튜브를 계획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방송은 한정적이고 손에 꼽히는 사람 외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18년차 개그맨으로서‘내가 그동안 재미있었던 게 뭐가 있었지?’생각해보니, 개그맨 2년차 때 했었던‘대단해요’를 진짜 웃으면서 아이디어를 짰더라고요. 그때 함께 했던 멤버인 임혁필 오빠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했어요.“가발 다시 쓰자!”라고 말이죠.(웃음) 제가 했던 일을 접목시켜서 앞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50~60세가 되어도 좋은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자 하는 큰 그림도 그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회복지학 공부도 해보고 싶어 계획 중 입니다.
눈이 내리는 아침, 목동 SBS 방송국 1층 카페에서 권진영 개그맨을 만났습니다. 스스럼없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권진영 개그맨은 연예인이기보다는 편안한 동네 언니 같았습니다. 어떠한 꾸밈이 아닌 진솔한 이야기를 개그로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어릴 적 만난 순수했던 <우비 삼남매>의 모습이 떠올랐지요. 섹시 어필 코미디가 통한다는 요즘 대단해요!, 개미송을 부르며 해맑은 웃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권진영 개그맨과의 인터뷰에 도리어 제 마음이 해맑아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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