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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레아’를 심는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2019년 5월호(11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7. 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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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통신 노익호의 지휘자 이야기 9]

 

‘부겐빌레아’를 심는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나는 꽃나무 ‘부겐빌레아’를 칠레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보라색 꽃과 훅시아 색(핑크도 아니고 자주색도 아닌 희안한 색)의 강렬한 이미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칠레의 바닷가 도시인 ‘비냐 델 마르’의 어떤 한 집의 담장과 대문 위에 걸쳐있던 부겐빌레아를 보는 순간 가슴이 뒤흔들렸더랬습니다. 1975년 칠레국제가요제가 ‘비냐 델 마르’에서 열렸었고 정훈희 씨가 ‘무인도’를 열창했었죠. 그래서 더욱 인상 깊었던 부겐빌레아였습니다.
그런 부겐빌레아를 수십 년 동안 해안가 밭에서 바나나 나무와 함께 심고 키웠다는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 정말이지 매력덩어리 아닙니까!

 

환경에도 힘쓴 상원의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2013년엔 이탈리아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급여는 장학금으로 기탁) 사르데냐 섬의 쓰레기 매립지를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바꾸는데 앞장섰으며 밀라노 시에 9만 그루의 나무를 심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보이스카웃 센터가 칠레 산티아고 근교인 ‘산 베르나르도’에 세워졌었지만 지금은 쓰레기 매립지로 선정이 된 것과 대비가 되는군요.
 
계속되는 그의 사랑 이야기
아바도는 말년으로 가면서 더욱 눈높이를 낮췄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진으로 부서진 도시에서, 부서진 극장 복구를 위해, 쓰나미 피해를 입은 후쿠오카 지방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물론 음악으로 위로를 주고, 현실적인 모금을 위해 연주여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또한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음악교육의 한 형태) 현장을 보며 어린이들을 친히 가르치고 지휘한 것들이 몹시도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이때  ‘구스타보 두다멜’ 을 알게 되면서 아바도는 아낌없이 두다멜을 후원하게 됩니다. 상원의원답게 아바도는 멋진 말도 많이 남겼습니다. “음악의 기술적인 완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음악의 가치와 감정을 찾는 것입니다. 나는 몇 개의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에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음악은 범죄, 매춘, 마약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하면서 그들은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죠.”,“문화는 사회적인 불공평을 극복하고 가난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유진 올만디의 예언
1967년에 유진 올만디(헝가리 출신의 대지휘자. 그가 지휘한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은 생애 꼭 들어봐야 할 명연주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로린 마젤, 이스트반 케르테츠, 주빈 메타, 클라우디오 아바도, 세이지 오자와 이렇게 다섯 명은 장차 틀림없이 거물이 될 유망주들이요.”그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다섯 명 모두가 거장의 반열에 있으니까요.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케르테츠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거장의 반열에 들어있는데 살아있었다면 카라얀 이후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잇지 않았겠냐는 추측도 무리가 아닐 만큼 뛰어난 실력파였습니다. 그 외 네 명도 오랜 동안 지휘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활동을 펼쳤으며, 펼쳐오고 있습니다.
 
지휘자의 위상
1980년 로린 마젤이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을 이끌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을 가질 무렵 지휘자의 가치를 다루는 한 신문사설이 눈에 띄었습니다. 카라얀이 해외 공연 시 받는 개런티를 소개했는데요. 이웃나라 일본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왔을 경우, 이를테면 카라얀이 1억 원을 챙기면 단원들은 9천만 원을 나눠 갖는 수준이라는 기사였습니다. 그만큼 지휘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소개한 것인데요. 당시만 해도 이런 구체적인 사실들은 평범한 일반인들이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고, 또 뭐든 돈으로 잣대를 들이대면 문화적으로 속되 보여 차라리 잘 밝혀주지 않았던 ‘비밀시대’ 였기에 개런티 숫자가 주는 기사는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카라얀의 바통을 누가 잡았는가
비록 나는 카라얀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지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1989년 카라얀 서거 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후임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초 집중되었지요. 베를린 필은 민주적인 투표 방식으로 단원들이 상임지휘자를 선출하기로 했는데 로린 마젤, 바렌보임, 세이지 오자와, 리카르도 무티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로린 마젤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양 후보를 지지하는 단원들 간의 대립이 너무 심한 나머지 제3안으로 아바도가 어떻겠느냐는 거론이 있었는데 결국 단원들은 아바도로 타협하는데 합의를 보게 되었답니다.
 
아바도의 반응
그가 보인 반응은 놀랍게도 ‘시큰둥’ 이었습니다. 속으론 좋아했겠지만 결코 득달 같이 좋아라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카라얀의 뒤를 잇는 그 자리가 선망의 대상일 수만은 없지요. 지휘자의 제왕인 카라얀과 즉각적인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에 심적 부담이 안 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적절한 시간이 흐른 후 수락하였고, 2002년까지 베를린 필을 멋지게 이끌었습니다. 
나는 1993년 처음 그의 연주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접했습니다. 당시 그는 침착한 태도로 말러의 교향곡들을 릴레이로 연주했습니다. 그의 인상은 카라얀의 카리스마적 외모와 너무나 달라서 차라리 키가 큰 기술자를 연상시켰으며 연주가 끝난 후 그가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다소 빠르게 고개를 들 때 머리카락이 뒤로 훌쩍 젖혀지는 폼이 우스워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휘하는 음악은 시간이 흘러 들으면 들을수록 정갈하면서도 편안함을 주는 맛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특유의 인사법이 멋있게 보이더군요.(1973년 빈 필을 이끌고 내한공연을 한 적이 있음.)
 
맺는 말
정통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아바도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교육을 받으면서 여느 아이들처럼 전쟁놀이를 하면서 컸고, 쥬빈 메타와 다니엘 바렌보임과 친구로 지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빈에서는 쥬빈 메타와 함께 카라얀이 종신 음악감독으로 있던 합창단의 베이스 파트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아바도는 동료 쥬빈 메타보다는 늦었지만 결국 세상에 알려지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되고 말지요. 2000년엔 위암으로 절망하지만 다시 무대에 섰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세상을 하직합니다. 저는 그의 태도와 그가 들려준 음악의 세계에서‘생의 진지함’에 대해, 그리고 ‘생의 환희 ’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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