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공동체 여행이 뭐꼬?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7. 10. 06:55

본문

[서양문화(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화(명)의 여명으로 20]

 

공동체 여행이 뭐꼬?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2017년 6월호는 일본 큐슈에 대한 공동체여행의 특집을 실었습니다. 여러 분들이 ‘공동체여행’에 관심을 보여주시면서 어떻게 하면 참여할 수 있는가를 물어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는 공동체여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공동체여행이 뭐꼬?’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했었습니다.


  ‘밖’을 향한 여행 전에 있어야 할 ‘안’을 향한 여행 
  ‘여행’은 모름지기 ‘밖’을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에 있는 내가 단지‘밖’에서의 경험만을 획득해 가지고 오는 것만으로 생각할 때에는 사실 시들해지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여행을 통해서‘안’인 내가 모든 여행과정을 쥐고 흔들어서, ‘밖’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내가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행기 가운데 그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 내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정말 행복한 경험을 하신 분들의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나요? 어떻게 그런 놀라운 변환transformation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국 ‘밖’과의 만남을 통해서 ‘안’인 내 자신이 변화되도록 내가 나를 통제하려는 끈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즉 여행의 성공여부는 ‘밖’을 향한 여행을 하기 이전에 ‘안’을 향한 여행, 자신의 삶의 끈을 먼저 놓아버리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물론 여행에 무슨 성공과 실패가 있느냐, 그냥 다녀오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쓴 것은 ‘돈’이요, 허비한 것은 ‘시간’이고, 누적되는 것은 ‘피곤’만이 될 경우가 허다하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여행의 정의와 목적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행에서 ‘안’인 나를 향한 여행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을 향해 여행가기 전에, 내가 살던 ‘안’,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향한 여행, 즉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가 관건인 셈입니다.

 

  가족중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못하는 세상?
  서구문화/문명의 영향을 받은 80억의 전세계에서 공동체는 점점 붕괴되어 가고 개인화된 매우 삭막한 개인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향은 개인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다한다는 장점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문 ‘사람 사이’人間라는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인간이 개인으로만 살 수 없고 반드시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서구문화/문명의 답은 영 젬병입니다. 기껏해서 현실적으로 내놓은 대안은 가족중심주의 밖에 없지요. 그러나 가족중심주의를 조금만 자세히 드려다 보면 그 치명적 한계는 금방 발각됩니다. 현대사회가 점점 핵가족화하고 너무 단촐해 가며,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한 학급에서 가정에 외동인 아이들이 1/3이상이 되어갑니다. 이러니 이 외동인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는 관계를 가지겠지만,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또래의 아이들과의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울 기회는 점점 적어져 갑니다. 한 가족 내에서 다양한 형, 누나, 언니, 동생의 관계가 거의 없고. 같은 동네에서 사심없이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과의 관계 자체도 없어지기 때문에 점점 외톨이가 되어갑니다. 물론 학교도 있지만 학교는 주로 경쟁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회에 나가서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여야 할지 도무지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 가족의 울타리를 넘으려고 할 때에 반드시 발생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곳을 향한 여행을 목적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집하고 여행을 계획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은 어떤 사람과 같이 가느냐가 결정적이라고 다들 말하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의 여행에 같이 갈지 사실 불안하기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가는 여행은 목적지향적인 것이 되고 여행하는 도중에 반드시 이기심이 동반되어 중간에 여행 자체가 붕 뜨게 될 위험이 늘 있습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러므로 제대로 된 공동체여행을 위해서는 도대체 공동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려해 보아야만 합니다. 공동체, 즉 ‘삶을 지속적으로 같이 살아나가는 무리’가 되기 위해서 첫째로 필수적인 것이 ‘신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뢰’하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선적인 질문은 ‘그 사람은 내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가’가 아니라,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이 믿을만한 존재’인가 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안’을 향한 여행이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런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지 않고 어거지로 공동체랍시고 이루어서 무작정 ‘밖’을 향한 여행을 감행했을 경우, 신혼여행 갔다와서 바로 이혼하는 부부와 같은 꼴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부의 경우에 사랑은 커녕 믿음, 즉 신뢰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있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사랑이란 것도 기껏해야 감정적인, 혹은 천박한 감각적인 것 밖에 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뢰를 받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경우가 생기게 되고, 이때에 필요한 공동체 형성의 둘째 조건이 바로 ‘용서’입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자세는 ‘내가 용서받기 전에 내가 먼저 용서한다’는 겁니다. 자식이 사고칠 때에 사회는 감옥에 보낼 수 있지만, 가족은 그 자식의 감옥 뒷바라지를 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먼저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자세를 가질 때에 공동체가 움트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당장에 생기는 문제는 과연 나는 어디까지, 몇 번이나 용서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삼세번’일까요?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자기가 매우 통이 큰 줄로 여기며 호기롭게 물었습니다. ‘일곱 번’용서하면 됩니까? 서구인들이 좋아하는 ‘럭키 세븐’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무한히 용서하라는 거지요. 여기서 바로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한 셋째 조건인 ‘종교’적 기초가 발생합니다. 용서는 아마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다른 종교들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입니다. 그 중에 기독교는 유난히 ‘무한한 용서’를 강조하는데,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이유는 내가 먼저 하나님에게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적 공동체에 속해 있나요?
  물론 이런 종교적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는 가운데 하는 공동체 여행을 통해서 ‘밖’과의 만남에서 얻는 정신적 영적 충격으로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 매우 포용력이 큰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이런 경우라도 결국 ‘안’즉, 나를 초월한 어떤 존엄한 다른 분, 존재, 얼굴(레비나스)과의 모종의 종교적 만남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계획적으로 할 수 없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연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일상적 삶을 통해서 ‘신뢰’와 ‘용서’를 연습할 수 있는 ‘종교적 공동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이비(종교적)공동체처럼 되어버린 좌파들의 모임에서는 결국 신뢰와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전통적 종교적 공동체가 주위에 있으며, 내가 현재 그런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 속의 종교들은 매우 세속화되어서 자기희생적이지 않고 자신을 위한 정신적, 영적 위안만을 받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집단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속의 종교적 언어는 화려하지만 비어 있으며, 크고 거대한 모임들은 많을 수 있으나 매우 형식화, 위선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 각자는 제대로 된 종교 안에서 이루어진 제대로 된 종교적 공동체를 누가 나에게 떡 갖다 바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특별히 한번 두 번 가는 여행을 위해서 뿐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삶이 얼마나 풍성할 것인가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만약에 이런 ‘신뢰’, ‘용서’, ‘종교적 기초’를 내가 제대로 형성하고 그런 공동체 속에 있을 때에 ‘밖’을 향한 여행에 대한 확신 혹은 자신감과 함께 밖에 대한 놀라운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본, 특히 한국과 오랫동안 악연을 이어왔던 큐슈를 향한 여행은 이런 기초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먼저 ‘안’으로의 여행을 준비한 후에 그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연습한 신뢰와 용서의 능력이 이제는 더 큰 ‘밖’을 향하여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가 되어가므로 우리 모두가 한국인, 일본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와 우주로 나가자고, 피해당하고 고통당했던 선조들의 후손인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번 큐슈 여행에서 만났던 정말 좋은 일본분들 중에 한 분이, 비록 이번에 처음 그리고 우연히 만났으며 우리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의 공동체에도 속해 있지는 않으나, 6월 말에 우리를 보러 오시겠다는 열정을 발휘하신 것에 너무 감사하여 한국인 특유의 따뜻한 손님접대의 정신으로 맞이하려 합니다. ‘2018년의 대만을 통한 중국 공동체여행’도 동일하게 저희가 먼저 ‘신뢰’, ‘용서’의 손을 내밀며, 서로 다를 수 있는 ‘종교적 기초’를 인정하고 깊은 대화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이번에 방문하여 관련한 일본분들과 학교와 학생들도 우리와 함께 대만과 관계를 이어가도록 돕는 가교의 역할을 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런 원리로 ‘2019년 서유럽 공동체여행’을 기획해 볼 생각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3호 >에 실려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