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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로 되어가기와 한국인으로 남기!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2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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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대학에서 만난 한국인]

일본인으로 되어가기와 한국인으로 남기!

 

 

  ‘상륙허가. 1990년 4월 6일 나리타 입국심사관 일본국’이것이 저의 여권에 기록된 입국허가입니다. 약 27년 전의 일이죠. 나가사키대학 공학부에 입학허가서를 받고 첫 발을 디딘 곳은 일본의 수도 동경에 있는 나리타 국제공항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첫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저의 마음은 두려움과 설레임 속에 긴장되어 있었지요. 그 당시 일본어가 여전히 서툰 가운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쁘게 출구를 찾았고, 무조건 제 앞에 걸어가는 사람 뒤만 졸졸 따라가면 출구에 도착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앞사람을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도착한 곳은 웬걸 다름 아닌 화장실! 저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소변을 보다가, 그만 출구를 향해 쫓아가던 그 사람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의 그 막막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요.

 

  겨우 친구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동경에서 나가사키 대학에 도착한 그날, 지도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저를 안내해 준 유학생 덕분에 기숙사에 도착했습니다. 나의 방과 나의 책상, 나를 위한 침대가 준비된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감동이어서 격한 눈물을 흘리며 순간 감사기도를 드렸지요. 당시 저의 유일하고 간절한 소망은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1년은 연구생으로, 또 3년은 박사과정 학생으로 총 4년간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정말 운좋게도 박사과정을 마친 그 해, 지도교수 밑에서 전임강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수도 없이 논문을 써내야 하는 교수님과 함께하며 줄기차게 논문을 써야 했지만, 치밀하고 근면하면서도 열심이 남다른 일본인 교수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었지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제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쉼 없이 논문을 쓰며 주어진 강의와 일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3년마다 갱신을 해야 하는 전임강사의 직분을 두어 번 갱신한 후, 그만 지도교수와 불화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돌이켜보면 저의 교만과 높은 마음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 더 솔직히 말하면 저를 종처럼 부리는 그가 싫었던 것이고, 제 속에 ‘이제 나도 같은 교수다’라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지도교수와 2년 동안 메모로만 대화를 하는 아주 험악한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고, 결국 지도교수와 서로 꼴도 보기 싫은 사이가 되고 말았죠. 이때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저의 이런 미운 마음을 극복할 수 없었죠. 그 후 포스트닥(post-Doc. 박사후 연구원) 자리로 미국 뉴저지 공과대학을 찾아 가족을 데리고 일본을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지원할만한 또 다른 펀드를 찾을 수 없어 저는 고립되고 말았지요. 일본에서의 계약기간이 만료 되었지만, 합당한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동으로도 서로도 갈 길을 찾을 수 없었을 때,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저의 처지를 이해해준 다른 일본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키야마, 스기야마, 이시마츠, 하시모토, 효도’ 이들 모두는 저를 자기들의 친 가족처럼 돌보아 준 하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제 삶에서 ‘일본인이 되어 가는데’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죠.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일단 학교를 나와 1년 동안 일본의 한 중소기업에서 기술개발 실장으로 일종의 포스트닥을 한 후, 현재 몸담고 있는 나가사키대학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모두가 저를 자기 친 가족처럼 돌봐준 그들의 몸에 밴 친절과 배려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내가 그들과 언제나 티격태격 다툼이 끊이지 않는 한국인 기질(?)을 가진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또 서툰 일본어를 하는 이방인으로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깊이 배려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인으로서 내게 그런 기색을 한번도 드러내지 않아서 오히려 일본의 나가사키가 저에게 아주 오래된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감정을 갖도록 해준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도교수에 대한 미움이 한없이 창피하게 느껴진 것은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런 제가 일본문화 속에서 일본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그들의 말의 속 뜻, 저변의 뜻을 알기에는 아직 멀었구나’를 깊이 깨닫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나가사키대학에서 참석한 첫 교수회의 때 이들의 대화와 회의 내용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제가 그동안 갈고 닦은 일본어 실력으로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서나 말을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뼛속까지 박혀있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삶, 예를 들면‘혼네’(本心 속마음)와 같은 것을 몰랐고, 그들의 생활습관과 그들의 가치관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공부하며 일상적으로 만난 일본사람들과의 대화와는 너무나 다른, 전문성에 들어간 이들 사이의 대화의 숨은 뉘앙스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한국문화와 가장 잘 드러나는 차이의 하나는 일본사람들에게 ‘빨리 빨리’는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엄마도 바쁘면 혼자 자기 걸음을 재촉할 뿐이고, 빗길을 걸어가는 엄마와 아이는 둘 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고가도 다 따로 따로 걸어갑니다. 앞서가는 엄마가 늦게 쫓아오는 아이에게 재촉하는 법이 없는데 이는 일본에서 흔히 보는 풍경입니다. 아이의 자립이 엄마의 바쁨보다 더 중시되지요. 즉 아이 스스로의 판단을 더 귀히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단번에 일을 끝내는 것도 없습니다. 징검다리를 꾸준하게 두드리며 건너가고 그래서 아는 것도 차근차근 확실하게 진행시킵니다. 빠른 길이 보여도 재빨리 그 빠른 길을 선택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처럼 유행이 빠르게 전달되지 않고 패션도 서서히 변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나가사키는 27년 전의 모습과 별 변함이 없습니다. 맨 처음 와서 살았던 유학생 기숙사는 지금도 그대로인데 반해 한국에서 살았던 춘천의 하숙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입니다.

 

  여러분이 깜짝 놀랄지 모르겠지만 다둥이 아빠인 저에게는 무려 7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춘천에서 태어난 첫 딸은 여전히 한국국적을 가지고 나가사키의 한 초등학교의 정식교사로 채용되어 근무하고 있습니다. 둘째인 장남은 동경에서 직장을 다니죠. 셋째인 아들은 동경에서 대학 3학년, 넷째인 아들도 올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다섯째가 고등학교 3학년, 여섯째가 중학교 3학년, 일곱째가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7명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데 물론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등록금만 마련해 주면 자립해 대학을 다녔고 지금도 무엇을 하든 그렇게 합니다. 이들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일본사람입니다. 삶과 생활과 습성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본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모를 따라 주일에 교회 가는 겁니다. 종교에 있어서 저는 아이들에게 의무적으로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아내가 사는 기독교적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며 아름다운 삶의 결실을 가져오는 것인가를 삶을 통해서 보이려고 했을 뿐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사는 삶의 하나입니다. 일본은 모든 게 신이 되는 나라인지라 다신(多神)적 영향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사람들은 사실 종교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27년을 일본에서 살며 저와 제 아내도 거의 일본인처럼 되어가고 우리 자녀들 또한 일본인으로서 살아가지만, 한국인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기독교적인 삶과 철학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가사키대학 교육학부 전병덕교수

bdjun@nagasaki-u.ac.jp

 

  5월 2일 일본 큐슈 나가사키에 도착한 첫 날 오후, 미리 약속한 전병덕교수를 만나기 위해 78세 할머니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속해 있는 ‘행복한동네문화만들기운동’ 커뮤니티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바로 대화를 위한 만남이었죠. 이 만남에는 재(在)일본 대한민국 나가사키 민단대표 강성춘님과 한국 유학생 대표인 문상준님도 같이 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 들었던 일본과 실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달랐고 현장감 있게 다가왔으며, 일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마련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을 편집하고 있는 편집장인 저도 일본은 처음인지라 대화에 집중하려 노력했지요. 민단대표 강성춘님의 말로는 현재 재일 한국인은 조총련에 4만 명, 민단에 45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조총련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6.25전후 재일한국인에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은 있어도 그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은 확인할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한과 북한의 삶의 결과가 확연히 드러나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단의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현실을 일본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2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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