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슈가 아트의 선구자, 최고의 슈가 아티스트 ‘최두리’를 만나다

2020년 4월호(12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5. 16. 12:33

본문

[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슈가 아트의 선구자, 최고의 슈가 아티스트 ‘최두리’를 만나다

 

 

최두리 기능장
건국대학교 농축대학원 식품공학과 석사과정졸업
동경제과학교 양과자·빵 본과 3년 졸업
France Arpajon 세계대회 입상
2012년 세계조리사대회 슈가크래프트부문 최우수상 그랑프리 수상
2016년 푸드 트렌드 페어 대형 케이크부문 대상
사) 대한슈가크래프트협회 회장
최두리케이크 공방 및 양수리 곽지원빵공방운영 

 

코로나가 점차 전 세계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할 즈음, 양평을 다시 찾았습니다. 다름 아닌, 3월호에 실린 곽지원 명장님과 한 식구인‘최두리’슈가 아티스트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죠. 제과제빵 분야의 최고 부부로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아간 최두리 슈가 아티스트의 치열한 삶의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구박 받다
저는 포항에서 20분 정도 더 들어간, 영덕 못 미친 장사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딸이 넷, 아들이 셋으로 7형제 중 제가 둘째였어요.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할머니는 둘째도 딸인 게 못마땅해 저를 발로 툭 쳐서 떨어뜨렸다고 해요. 엄마는 애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새파랗게 질렸을 뿐 다행히 죽지는 않고 살아있었다고 하더군요. 태어나면서부터 엄청 구박을 받았죠. 그러니 학교인들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하는데, 할머니가 보내주지 않는 겁니다. 어느 날, 고종사촌이 교복을 입고 저희 집에 왔는데, 저는 그날부터 씩씩 거리며 난리를 피웠죠. 수수밭을 엄마랑 둘이 매며 “엄마! 나 학교 안 보내주면 죽을 거야!”하고, 울면서 떼굴떼굴 땡볕에 뒹굴었어요. 엄마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묘책을 냈습니다. “할머니 몰래 일찍 일어나 개울 밑에 가서 숨어 있어.” 하시더니, 다음 날 어머니는 다라이에 이것저것 팔 것을 담아 개울에 숨어 있는 저에게 오셨어요. 그 물건들을 팔아 중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죠. 하지만 몰래 중학교를 다니다 보니, 어딜 쏘다니냐며 곰방대로 할머니에게 맞기도 했죠. 중학교 졸업 후, 저희 마을에서 9명이 고등학교를 지원했는데 저 혼자 포항여고에 붙었습니다.

일찍 철이 들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 선수였어요. 어릴 때 가방을 허리에 매고 매일 1시간씩 10리, 4km를 뛰었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봄이 되면 교실에 진달래로 꽃꽂이를 하고, 청소 등 어떤 것을 해도 솔선수범하니 선생님이 예뻐하고, 열심히 하라며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제가 철이 좀 일찍 들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다녔습니다. 당연히 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6.25때 다치셔서 일하시기 어렵고, 줄줄이 딸린 동생들에, 큰언니는 일찍 일본으로 시집을 간 상태라, 제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뭐든지 잘 할 것 같은 근거 있는 자신감
 서울에 올라와 처음 취직한 곳은 명동에 있는 이모부가 운영하는 섬유 수출 무역회사였습니다. 당시에 명동하면 시골 사람들이 엄청 동경하는 곳이잖아요. 명동 사람들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알았어요.(웃음) 그곳에서 외환 업무를 담당했죠. 회사에 직원들도 많았지만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그 당시 월급 5만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을 하나, 둘 서울로 데려오다 보니, 이모부 집에 계속 있을 수 없어 창신동 판자집으로 옮겼습니다. 이모부는 동대문의 큰 기와집이었죠. 서울에서 여동생 둘, 남동생 셋을 책임지며, 저는 언제나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신세 한탄할 시간이 없었던 거죠. 외환 업무를 11년 동안 하며 거의 은행에서 살다시피 하고, 업무상 남자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남자들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일을 맡으면 무엇이든 다 해결했어요. 이래저래 인정도 받고, 수완 좋게 은행에서 판매하는 티켓도 잘 팔다보니, 월급보다 몇 배의 돈도 생겼습니다. 지갑에 돈이 마르지 않았죠. 동생들 대학에, 시집 장가까지 다 보냈습니다.

최고의 남편을 만나다
 남편인 곽지원 명장과는 학원에서 공부하며 만났습니다. 업무상 일본 바이어들을 만나야 하니, 실력을 키우기 위해 일본어 학원에 다녔거든요. 남편은 그 당시 몹시 말랐고 되게 못생겼는데(웃음), 선 본 사람들 가운데 저희 남편이 그래도 제일 나았어요. 제 나이 또래 여자들에 비해, 저는 좀 어른스럽게 남편감을 골랐던 것 같아요. 당시 저희 남편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고, 눈동자가 항상 똘망똘망하니 영민해 보였거든요. 이런 남편을 술 좋아하는 남동생들과 엄마는 무섭고 빈틈이 없다고 싫어했어요. 하지만 제가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흉볼 것이 없으니 친정에 남편의 불만을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평생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잘 선택한 것 같아요. 남편을 존경합니다.(웃음) 

일본 동경제과학교에서의 이지매를 견디며 
 1985년 남편과 빵을 배우겠다고 일본에 도착해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지요. 등록금이 제일 비싼 동경제과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할 때, 빵을 만드는 것은 재밌었지만 이지매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학생들은 열여덟 살 정도로 어린 데 반해, 저는 한국인에, 나이도 많고, 김치 냄새가 난다며 왕따를 시켰습니다. 1학기 동안 엄청 힘들었어요. 실습하다 과일을 깎으면 껍질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껍질을 쓰레기통에 그냥 버리는데, 일본은 조원 6명에게 일일이 다 물어보고, 오케이 하면 버리는 겁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을 잘 몰라 그냥 버렸는데, 저희들끼리 쏙닥거리며 제 흉을 보더군요. 뭐 하나를 하려고 하면 싹 뺏어 버리고, 중요한 것은 자기들끼리 수다 떨며 하고, 나이가 있으니 싸울 수도 없고… 한편으론 창피하고, 한편으론 속상해 화장실에 가서 펑펑 울었지요. 제 눈이 빨갛게 된 것을 본 선생님은 열심히 해서 이겨내라 하셨습니다. 

말이 필요 없고 행동!! 실력에 실력!!
 동경제과학교에 6개월 동안 다니며 궂은 일 다하고, 배우면서 못한 부분은 집에 가져와 밤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니 시험을 봐도 만점, 실기도 손재주가 뛰어난 제가 잘하니 말이 필요 없더군요. 학생들은 “어제는 분명 못했는데, 어찌 그리 잘하는거야…” 놀라더군요. 무엇보다 제 안에 지기 싫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길거리에서 과일 장사를 하며 손님이 오지 않을 때는 공부를 했습니다. 노트에 써 놓은 것을 옮겨 쓰고, 외우고, 장식 만들기가 있으면 10번, 20번 길에 서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습을 했어요. 1학기가 지나니 학생들이 저를 인정해주더군요. 같이 식사하자며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그때야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결석, 지각 한 번 없이 동경제과학교를 남편과 같이 다녔죠. 졸업식 날, 양과자 본과 부문 1등을 부르는데 남편 이름을 부르더군요. 저는 속으로 ‘아~ 나는 왜 안 부르지?’ 했습니다. 선의의 경쟁심을 가지고 남편보다 더 잘해야지 했는데 그만 차석이 된 것이죠.(웃음)

자기 창피하다고 ‘전(全) 일본 제팬 케이크쇼’에 나가지 말라는 ‘이나다 가즈꼬’ 선생을 설득하다 
 양과자를 배우면서 주말은 쉬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토요일마다 슈가 아트를 ‘이나다 가즈꼬’ 선생에게 따로 배웠습니다. 일본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내며 ‘전(全) 일본 제팬 케이크쇼’에 제 작품을 출품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즈꼬 선생에게“저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일본에 머무는 동안 출품이라도 해보는 게 제 소원이니 대회에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한 번에 “노”하더군요. 그리고“너는 실력이 안 되니, 내가 창피하다. 그러니 나가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제 속에서 ‘아! 선생님이 또 한국 사람이라고 나를 이지매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가즈꼬 선생에게 배우는 내내 좀 더 잘 보이고, 좀 더 배우려고 매일 도시락을 싸서 드렸습니다. 이런 저에게 선생님은 늘 딱 하나 가르치고 연습시키면 땡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배운 실습 도구는 바로 사와 집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선생님이 하나 가르쳐 주면, 그 다음은 뭐냐고 물으니 “넌 왜 이리 빠르냐!”고 도리어 화를 내셨죠. 제가 일본 사람처럼 시간이 주야장창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의 목표가 있잖아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카톨레야 서양란 48송이를 몇 날 며칠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만드는데 너무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나중에는 귀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죠. 48송이를 스치로폼 몇 개의 박스에 넣어 선생님에게 가져갔어요. “저 신청하게 해주십시요!” 그러니 가즈꼬 선생이 “그러면 3단 말고 2단 케이크로 출품하라” 하시더군요. 집에 가서 다시 3단을 만들어 갔습니다. 2단은 너무 작았거든요. 때마침 선생님은 다음날 일본 학생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슈가 투어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제가 찾아오니 짜증을 냈지만, 그래도 케이크 장식에 더스팅 컬러도 발라주고, 꽃을 세련되게 해주셨습니다. 

‘이나다 가즈꼬’ 선생도 받지 못한 동상을 받다
 가즈꼬 선생에게는 일본에서의 좋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 대회에 나가보고 싶노라며 여러 가지로 설득했지만, 대회에 나가니 상을 받고 싶은 겁니다. 제 작품은 초라한 편인데, 옆에 작품을 보니 프랑스 슈가 공예, 초콜렛 공예 등 1미터나 되는 대작들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밀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더군요. 그런데 웬걸 전시회가 이틀이 지난 후,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최상! 동상을 받았어요.”하는 겁니다. 저는 거짓말인 줄 알았죠. 다음날 새벽 득달같이 일어나 남편과 집을 나섰습니다. 9시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서 확인하니 ‘동상’이라고 붙어있더군요. 남편과 둘이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일본에서 설움 받으며 배웠던 시간들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전(全) 일본 제팬 케이크쇼’는 우리나라로 치면 ‘전국 제과제빵 대회’인데 가즈꼬 선생도 출품해서 상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이분에게서 배운 제자로 처음 받은 겁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가즈꼬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호텔에 저와 남편을 초대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축하 파티를 크게 열어 주었습니다. 동경제과학교에서 곽상 1등, 최상이 2등으로 졸업하고 대회에 나가 동상까지 받으니, 저희 둘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거죠. 제가 동상을 받자 동경제과학교에서 가즈꼬 선생을 불러 수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고맙게 생각하셨죠,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제 꿈에 이따금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일본사람들에게 지기 싫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 ‘오페라모임’에 가다
 저희 부부는 빵을 일본에서 배워 한국의 유명한 빵쟁이들을 몰랐어요. 도리어 일본 학교에서 소개를 받았죠. 저희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동경제과학교 교장과 담임이 저희를 불러“한국에 가자마자 빵집을 열면, 프랑스 빵을 배우지 못하니 바로 프랑스로 가라”하더군요. 일본사람들도 30년 빵집하고 모은 돈으로 배낭 메고, 프랑스에 가서 제과 일을 배우고 온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 유럽 최고의 빵집에는 일본사람들이 다 박혀 있었어요.‘참 무서운 종자들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랑스 ‘오페라모임’에서 빵을 배우는데, 그곳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합니다. 근처의 카페를 통째로 빌려 프랑스 전역에 빵집 하는 사람들이 떼제베를 타고 모이죠. 그날 하루는 자기 집의 유명한 케이크나 빵을 소개하고 레세피를 공유하는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저희에게 매우 유용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저와 남편 둘이었습니다.


‘모듀이’제과점에서 프랑스 설탕공예를 본격적으로 일하면서 배우다
 남편이 먼저 프랑스 모듀이 제과점에 들어가 일을 하며 신임을 얻고 쉐프와 친해지자, “우리 와이프도 설탕공예를 잘한다.”고 했죠. 쉐프가 “그러면 한번 데려와 봐라”해서, 제가 가서 장미를 진짜 장미처럼 만들어 보이자, 바로 내일부터 출근하라 하더군요. 그곳에서 1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도 않고 일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쉐프에게 잘 보이려고 새벽 6시에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고, 프랑스 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센스 있게 알아듣고 하니 저에게 일을 많이 시켰습니다. 덕분에 실력은 많이 늘었지요. 하지만 손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불 밑에서 일하느라, 손등은 시커멓고 손은 다 갈라졌습니다. 프랑스에 1년 8개월을 머물며 프랑스식 설탕공예, 영국의 웨딩 슈가크래프트를 배우고, 우리나라에서 최초, 최고의 설탕공예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출간했죠. 


‘영국식 설탕공예’와 ‘프랑스식 설탕공예’의 명백한 차이
 슈가 파우다와 젤라틴, 식용색소 등의 반죽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단순한 케이크를 넘어선 하나의 예술 작품인‘영국식 설탕공예’와 먹는 설탕이 아닌 보는 설탕, 감상하는 설탕의 성지라 불리는 ‘프랑스식 설탕공예’가 이 분야의 커다란 두개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프랑스식 설탕공예는 남성적으로 굉장한 힘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반면 영국식 설탕공예는 매우 여성스럽습니다. 섬세하고 화려해서‘설탕공예의 꽃’이라고 할 수 있죠. 
 프랑스식 설탕공예는 설탕을 끓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 온도가 무려 170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프랑스식 설탕공예를 꼽는 이유죠. 끓인 설탕을 반복적으로 잡아당겨 열을 제거하면서도 설탕이 굳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때 고도의 집중력은 물론, 온몸의 힘을 쏟기 때문에 강한 체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일단 자신의 손으로 황금빛 작품을 빚어본 사람이라면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탕공예는 광택이 생명입니다. 조금만 높은 온도에서 작업하면 광택이 사라지고, 낮은 온도에서 하면 광택은 아주 좋은데 유리알처럼 되어 손을 베일 수 있어, 작업이 굉장히 어려워요. 
설탕공예는 우리가 100% 먹을 수 있는 케이크 위에 장식하기 때문에, 꽃잎과 수술 하나를 만들 때도 100%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꽃잎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꽃잎 하나하나, 꽃 수술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분해해 보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소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꾸준한 관찰로 이제는 대략 꽃을 보면 꽃잎은 몇 개인지, 암술과 수술은 몇 개인지 바로 알게 되었죠. 


생화 VS 슈가화, 진짜 승자는?
 TV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서 네 번 정도 촬영을 한 것 같은데요. 코엑스 지하 몰에 신부 두 명이 한 사람은 생화, 한 사람은 슈가화를 들고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진짜 꽃에 스티커를 붙이게 했어요. 그랬더니 슈가화에 다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생화를 이긴 것이죠. 사실 저도 놀라웠어요.(웃음) 저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말합니다. “3개월만 하면 작품상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친다!”라고요. 그러면 처음 배우러 오는 제자들의 공통된 말은 “전 손재주가 없어요.”, “제가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하는데 다들 금상, 동상, 최우수상을 받아옵니다. 이 일을 30년 넘게 하면서 저도 가르치는데 자신감이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가깝게는 올해 안에 시험을 봐서, 기능장에서 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3년 후, 국내 일을 내려놓고, 남편과 함께 6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며 외국에 나가 있는 제자들을 직접 방문해 빵과 여러 기술을 가르쳐주려 합니다. 제자들과 먹고 자며, 그 나라의 문화 이야기도 듣고 하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래서 열심히 영어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과 연습’밖에 없었다는 최두리 슈가 아티스트. 지금도 자다가 작품의 디자인이 떠오르면 바로 일어나 대충이라도 스케치를 한다고 합니다. 케이크를 하기 위해서 꽃꽂이, 색채학 등을 공부했다는 최두리 슈가 아티스트는 설탕공예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심’이라고 했습니다. 신의 작품보다 더 진짜처럼 만드는 그녀, 만든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땀방울이 보이는 듯 합니다.

 

최두리 케이크공방 
031-775-0375 / kjwm7777@hanmail.net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6>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2020년 4월호(126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나는 뒷모습을 위해…  (0) 2020.05.16
크루징(Cruising)의 맛  (0) 2020.05.16
노준진 -‘펠리컨’  (0) 2020.05.16
꼴 보기 싫은 것들이 있다  (0) 2020.05.16
쉬어갈 차례, 인생의 방학  (0) 2020.05.1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