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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뒷모습을 위해…

2020년 4월호(12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5. 1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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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ive & prospective 27] 

떠나는 뒷모습을 위해…

 

전국이 코로나19로 뒤숭숭한 가운데에도 새싹이 돋고 바람의 감촉이 달라졌다. 그렇게 봄은 오고 있었다. 1년 전 고관절 수술을 받으신 시어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으시고, 더 이상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가족회의 끝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신 큰시누이가 모시기로 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고 복덕방에 내놓은 어머니의 집이 팔렸다는 소식이 왔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남편의 형제가 모여서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기로 했다. 


생활력이 강하셨던 어머니는 그 성격답게 방마다 수납장에 물건들이 그득히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사은품, 경품으로 받은 휴지, 수건, 우산 등도 엄청 많았는데 아마도 어머니는 그것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명절에 올 자식 손자들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현관 앞 끝 방을 지나 거실로 향하니 에어컨이 놓여 있다. 
어느 해 늦여름 추석에 가족들이 집에 모였는데 아직은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아 기온이 높아 꽤나 날이 더웠다. 어머니께서 전기세 걱정하시며 선풍기도 아껴서 틀고 계시는 것을 본 남편이 그날로 최신 스탠딩 에어컨을 선물해 드렸다. 하지만 내가 알기에 어머니는 자식들이 오는 추석 이외엔 선풍기나 부채로 더위를 이기며 그 에어컨은 한 번도 틀지 않으셨을 것이다. 커버까지 씌워서 보관한 덕분에 에어컨은 거의 새것이었다. 
제법 넓은 베란다에는 수많은 장독들이 놓여 있었는데 장독마다 3년, 5년 된 간장, 고추장이 그득했다. 언젠가 어머니는 따뜻한 아파트라 서늘하게 쌀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나의 말에 항아리에 쌀을 보관하면 벌레가 생기지 않으니 아무거나 항아리를 하나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는 둘 곳도 마땅치 않고 모던한 인테리어에 지나치게 고색창연(?)한 물건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완곡히 거절했다. 


안방을 둘러보니 오후 햇살에 자개장롱이 반짝이며 오색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어머니는 총 6남매를 두셨는데 그중 나는 막내며느리다. 우리 집을 제외하고 나머지 5남매는 결혼을 할 때마다 혼수를 자개장으로 해야 했다. 자개장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우리 시어머니에게 결혼 초기부터 점수를 깎이기 싫은 며느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리 준비했던 장롱을 자개장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막내이고 좁은 신혼집에 거대한 자개장이 안 들어간다는 핑계를 대고 빠질 수 있었다. 그땐 그런 것을 주장하시는 어머니의 생각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내가 자개장의 아름다움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되다니… 
거의 한나절 동안 5명이 방마다 다니며 정리를 마쳤다. 거실에 모여 한숨을 돌리며 차를 마시면서 각자 필요하거나 탐나는 물건을 가져가기로 했다. 가족사진, 보료, 돌침대, 냉장고 등… 남편은 나에게도 고르라고 했다. 나는 작은 방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자개 5단장을 갖겠다고 했다. 남편과 시누이들은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자개 안 좋아하지 않았어?”, “그렇게 오래된 걸 갖겠다고?” 전쟁에서 얻어낸 전리품처럼 나는 뿌듯하게 자개장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어머니의 손때 묻은 살림들을 정리하며 한사람이 떠나는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소유욕과 물욕의 젊은 나이를 지나 중년이 되면 자신의 삶이 단순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노년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정리하듯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며 짐을 줄이는 연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면 필요 없는 짐들을 정리하리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 정리와 대청소를 할 때마다 필요 없어진 짐을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또 새로이 생기는 짐이 버리는 짐을 능가해버리곤 한다. 언젠가 세월이 흘러 내 짐을 아들과 며느리가 정리하는 날이 오면 의미 없는 잡동사니 짐들을 버리느라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추억이 서린 의미 있는 물건들만 남길 바란다. 본의 아니게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요즘, 주변을 정리해 보자. 떠나가는 뒷모습을 정리하듯 산뜻하게 내 주변을 정리해 보자. 일상이 무너지고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불안이 우리를 덮치는 지금,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남기는 연습을 해보자. 조금은 몸과 마음이 정돈되고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딱딱한 나뭇가지를 뚫고 어김없이 이 봄에도 생명력을 보여주는 새싹처럼…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본부장 손미정 

mirha200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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