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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징(Cruising)의 맛

2020년 4월호(12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5. 1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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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이야기 4]

크루징(Cruising)의 맛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각자의 세계 속에 유폐시킨 채, 어떤 의미에선 일종의 부조리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꽉 짜여 있던 삶의 씨줄, 날줄들이 무력하게 헤어지며 사람들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삶이 이렇게도 살아질 수 있다는, 원래 존재했으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경험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도시인으로 살아왔다. 대학 시절과 연말 여행, 승마 국토종주, Tour de Korea 로드 레이스 대회 등 몇몇 단절된 시간들을 빼놓고는 시간을 분할해 사용하고 일정에 쫓기는 삶을 살아온지라, 이번 북태평양 일주 트립 참가를 구상하면서 요트에서 3일, 6일 동안 이어질 바다 생활을 경험하는 것 자체에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완전한 단절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 그리고 새로운 환경 속의 나를 발견해 보기…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배가 3일 만에 일본 최남단 섬인 이시가키에 도착했을 때, 선장님은 섬에 머물며 느끼는 것 자체가 크루징의 즐거운 재미 중 하나라며 이시가키섬을 둘러볼 것을 권하셨다.
이시가키섬에 처음 진입해 하마시키 마리나 계류장*의 빈 공간에 배를 대고 세관 검사를 받고 있는데“다메다메~(안돼 안돼)”하며 계류장 자리의 주인인 듯 보이는 일본 남자가 배를 빼라고 손사래를 친다. 한국 국기를 달고 있는 외항선에다 일본의 경우, 배를 정박하는 모든 곳에서 세관 및 검역 검사를 받아야 한단다. 현지 세관이 나와 배 안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잠깐 세관 검사만 받고 자리를 옮기겠다고 해도 어민으로 보이는 다른 일본인이 막무가내로 계속 배를 빼라 했다. 같은 일본인인 세관원이 겸연쩍어하며 검사를 일찍 ‘수습’하고 돌아갔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일본인의 모습은 차치하고서라도 몇 날 며칠을 바다에서 고된 항해를 하고 정박한 외항선에게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Seamanship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색해진 상황이었다.
선장님께 들어보니 6년 전 마리나가 처음 생겼을 때와는 달리 도시 풍경이 상전벽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대만·필리핀·일본·중국의 해상 교통 요지에 위치한 이시가키라는 작은 섬 동네에 호화 유람선이 드나들기 시작하고, 조용했던 섬마을에 호텔들이 들어서며, 시장이 형성되고, 물가가 폭등했다. 실제로 이시가키의 렌터카 비용은 오키나와보다 정확히 두 배가 비쌌다. 자연스레 외국에서 정박하는 외항선들이 많아졌을 테고 배를 계류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마리나 안에서도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공공 마리나의 계류 자리를 불하 받은 현지 주민들의 인심 역시 도시 외연의 확장과 함께 악화되었을 것이다.
육지에 내려 렌터카를 빌리고 밀린 빨래를 하러 가는 길, 오랜만에 육지에 발을 디디니 머리가 울리고 피곤이 엄습해 온다. 흔들리는 바다에 계속 있다가 다시 흔들리지 않는 육지에 서면 생기는 반대 현상, 소위 ‘육지 멀미’다. 작은 호텔 하나를 빌려 몸을 씻고 세탁기를 돌렸다. 항구에 있는 뱃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호텔이라 그런지, 일본 특유의 작은 호텔 속 작은 화장실 옆에 세탁기가 하나씩 놓여 있다.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감기도 견딜 만해졌다. 빨래를 했지만 옷이 마르지 않아 코인 세탁소를 다시 찾아가 옷을 말렸다. 밤에는 선장님을 모시고 나와 식사를 하며 한·중·일의 칼에 엮인 문화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항구 옆의 커피숍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즐겼다. 다시 마리나에 돌아와 인터넷을 켜고 필리핀 항해까지의 기상을 체크했다.  

    
계류줄에 조용히 정박해 있던 요트는 그대로 마리나의 선상 호텔이 되었다. 남쪽으로 꽤 내려왔는지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 배 뒤편에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항구의 밤을 즐기며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새벽 두 시 무렵, 변크루가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요트를 댈만한 곳이 없어서 일반 계류장 밖의 어중간한 곳에 배를 댔는데, 현지 어민들의 말과는 달리 물이 예상보다 많이 빠져 계류줄에 10톤 무게의 배가 얹히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을 청하시다가 끼익~ 거리는 밧줄 소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선장님이 새벽에 이를 발견하시고 깜짝 놀라 크루들을 깨우고 계류줄을 다시 풀어 배에 여유를 주었다. 사이트를 조회해 이시가키의 만조, 간조 시간을 검색해 간조 시간 만큼 줄을 충분히 풀고 다시 잠이 들었다. 만약 이를 늦게 발견했더라면 배의 클릿트*와 헐*이 손상되는 큰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상황을 주시하며 긴장하는 선장님을 바라보며 작년에 모아나호를 가져오면서 표류했던 기억이 났다. 엔진이상으로 표류해 들어온 돌산도 어항에, 바다에서 하루 종일 고생한 크루들이 잠에 깊이 빠졌을 때에도 나는 배가 걱정되어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깨 어선들 사이에 끼어있는 배를 보러 갔다. 결국 새벽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민이 무심히 풀어둔 계류줄에 모아나호는 선미 쪽 줄 하나가 겨우 옆 배에 묶인 채 어항에 둥둥 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배를 어렵게 수습했던 기억이다.      
선장들은 배가 항해 중에 있을 때와 안전한 곳이 아닌 곳에 정박해 있을 때 편히 잠을 잘 수 없다. 항해의 처음 시작이자 마지막의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이 중압감을 잘 알기 때문에 이번 항해는 선장이 아닌 크루의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 마음이 편해 좋았다. 나의 배였다면 그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한시도 쉬지 못하고 더 큰 맘고생을 했으리라. 동시에 우리의 안전에 최종 책임을 지고 있는 노선장님의 노고가 더 크게 느껴져, 미안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잠에 곤히 빠진 선장님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호텔에 가 조식을 먹었다. 이시가키에서 만난 호텔의 아침은 예상외로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따뜻한 미소와 밥다운 밥, 채소 샐러드, 두부, 상냥한 일본 주방 아주머니. 숙소에서 언제 다시 할지 모르는 샤워를 하고 돌아와 세관과 출입 수속을 밟고 잠깐 동안의 섬 여행을 떠났다. 마트에서 신선식품들을 구입한 뒤, 후사키 비치리조트 옆 바다에 들러 잠깐의 망중한을 즐겼다. 며칠을 질리도록 바라본 바다인데도 육지에서 보는 고요한 바다 맛이 또 좋았다. 마리나에 돌아와 편의점 도시락을 사다 먹고 정오 쯤 필리핀 수빅을 향해 6일간의 세일링에 다시 들어갔다.

 

* 계류장 : 보트나 배를 타고 내리거나 물자를 운송하기 편리하게 만든 장소
* 클리트(Cleat) : 갈고리의 일종. 보통 나무 또는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모양은 가지각색이다. 갑판 또는 선내(船內)의 어느 곳에 고리를 고정시키고, 여기에 로프를 매지 않고 감아 두기만 함으로써, 로프의 끝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 헐(Hull) : 용골에서 갑판까지의 보트 선체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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