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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빛, 태양과 연초록형광 플랑크톤!

2020년 7월호(12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9. 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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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 요트이야기 7]

빛과 빛, 
태양과 연초록형광 플랑크톤!

예상치 못한 해류로 배는 아주 천천히 기주만으로 목적지 수빅 마리나를 향해 나아간다. 저위도 세일링 항해의 낮 시간은 햇볕을 견디는 시간이다. 눅눅한 공기와 바람, 조금이라도 살에 닿으면 몸을 바스러트릴 듯 뜨거운 태양, 실제로 피부에 닿는 햇볕들이 아. 프. 다. 최대한 햇볕에 닿지 않기 위해 요트 위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그늘막을 풀어 묶었다. 그러다 두꺼운 이불을 펴서 요트 앞쪽의 빛을 차단했다. 얼음벽 이글루가 북극의 강한 추위를 막는 것처럼 두터운 이불이 강한 열기를 막아주어 한낮의 열기를 견디기가 한결 낫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태양을 피할 순 없다. 햇볕이 반사되어 바다에 비치는 물빛 또한 어마어마한 빛으로 피부를 태우기 때문이다. 몸이 사방에서 저위도의 강렬한 빛들에 사정없이 노출된다. 세일링을 하면서 선크림을 늘 챙기지만, 이 막대한 광량 앞에서 어느 순간 피부 관리의 개념 따윈 금세 잊게 된다. 세일러들의 백색 옷은 코발트블루의 바다와 잘 어울리는 멋진 화이트 컬러가 아니라, 기실 이 빛과 열기들을 조금이라도 덜 흡수하기 위한 절실하고 불가피한 선택들이다. 


수빅을 향하는 낮에 오토파일럿이 고장 났다. 이를 수리하느라 엔진을 멈추자 2노트씩 배가 뒤로 떠밀려간다. 거리에 손해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배가 표류하고 있는데, 무풍지대에 바람이 불지 않으니 그 열기가 대단하다. 러더를 풀어 놓으니 배가 방향을 잃고 파도 위아래로 출렁거려 수리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나침반을 163도에 맞추고 휠을 메뉴얼로 조정하니 배가 조금 안정된다. 그 사이에 선장님이 배에 들어가 말썽이 된 오토파일럿을 수리하셨다. 잠깐의 수리를 마치고 다시 엔진을 켜니 속도가 올라가고 바람을 밀어내 스턴 쪽에 바람이 불어온다. 그제서야 좀 살 것 같다. 한국의 여름도 마찬가지이지만 바람이 없으면 세일링이 고되고 힘들다. 


멀리 위태위태한 작은 방카를 타고 홀로 서서 어업을 하는 어민들이 다가왔다. 갓 잡은 물고기를 사 먹으라고 참치 등의 고기를 맨손으로 들어 올린다. 50~100cc 용량 정도로 보이는 시끄럽고 작은 엔진과 작은 방카에 의지해 머리 두건을 쓰고 20해리가 넘는 꽤 먼 바다까지 나와 조업을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삶의 본질, 곧 내 몸과 에너지를 써서, 나의 몸에, 또 내 가족들의 입에 몇 입씩 음식을 떠 넣고 또 떠먹이고 사는 모든 일들이 새삼 숭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루손섬이 바람을 막아준 남중국해의 밤은 고요하고 온화했다. 보름달을 보며 떠난 여행이 섬으로 가까이 붙으니 어느새 그믐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물고기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시간이라 1인 방카들이 나와 항로 위에서 라이트를 켜고 조업을 하고 있어 밤 경계를 쉴 수 없다. 배가 다가가면 작은 방카들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불빛 색을 붉은색으로 바꾸며 강하게 경계한다. 멀리 수천, 수만톤급 유조선들이 바다 위를 함께 오가는 상황이라 섬 옆을 가깝게 지날 때면 밤 경계를 서면서도 졸지 못하고 앞을 봐야 했다.


바다는 해가 지면 곧 밤이다. 그래서 낮 12시간, 밤 12시간 정도 순번을 정하고 교대를 이루어 세 시간씩 경계를 섰다. 컴컴한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레이더의 불빛과 배의 속도와 풍량, 풍향을 측정하는 기계 장치의 LED들. 그리고 다가오는 배들의 AIS(선박자동식별시스템) 신호들 뿐이어서 지루하고 피곤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보이는 달빛과 달에 비친 구름들, 반짝이는 별빛들과 은하수가 그 시간들을 아름답게 지켜주고 있었다. 달이 그믐으로 이울어 빛이 사그라드니 별빛들이 장관이다. 윤동주의 서시에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표현은 세파에 부끄러움과 괴로움 속에 늘 흔들리게 마련인 인간의 고행적 삶에 대한 비유임과 동시에, 실제로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들을 보고 시인이 말한 중의적 의미임을 새로 깨닫게 된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하늘에서는 별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인다. 


배 뒤편으로 촘촘히 박힌 별의 하늘과 서편의 달빛을 은은히 품은 구름들의 신비한 문양을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배 아래를 바라보니 전진하는 배의 러더(방향타) 뒤편으로 물빛들이 부서지며 바스락거린다. 처음에는 항해등을 비추고 있는 불빛이려니 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보다 더 많은 불빛들이 보인다. 배의 뒤쪽만이 아니라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옆의 흘수선 쪽으로 형광빛들이 부서지며 반짝인다. “이것이 뭐죠?” 더위에 잠에서 깬 선장님께 여쭤보니 “플랑크톤”이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아, 형광 플랑크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주요 장면들에 등장했던 바로 그 연초록 형광빛! 영화 속에서 고래가 되고 큰 가오리가 되어서 밤하늘을 밝게 비추던 그 형광색 플랑크톤이 바다에 실제하고 있었다. 부서지며 반짝이는 그 빛이 얼마나 영롱하고 또 아름다웠는지, 나는 교대 시간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갑판 위에서 그 신비한 빛들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고,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져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또 늦은 잠에 들었다.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9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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