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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최초 아나운서 실장 전 KBS 박경희 아나운서를 만나다

2020년 7월호(12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9. 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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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한국 여성 최초 아나운서 실장
전 KBS 박경희 아나운서를 만나다 

1977년 KBS 공채 4기 입사
1992년 한국방송대상 수상
1993년 청주KBS 아나운서부장
1994년 KBS 현업총괄 차장
1998년 KBS 한국어연구부 부장
2008년 성균관대 언론학 박사
2008년 KBS 아나운서실장
2011년 ‘최고의 아나운싱’발간
2012년 KBS 정년퇴임

 

 갑작스럽게 여름이 고개를 내밀어 땀샘을 자극하던 날, 한국 여성 최초 아나운서 실장을 역임하고, 우리나라 현대사를 고스란히 뉴스에 담아내기 위해 젊음을 불태운, 전 KBS 박경희 아나운서를 만났습니다. 이분을 통해 대한뉴스, 88올림픽,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등에 담긴 생생한 역사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에서 아나운서로 
 1977년 1월, 저는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전 순위고사)를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나마 사회에서 남녀 간 차별도 적고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는 곳 중 하나가 학교였어요. 여자도 교장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어머님을 비롯해 집안에 선생님들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저의 목표는 선생님이었죠. 그런데 우연히 KBS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화면에 KBS 아나운서 채용공고가 지나가는 거예요. 순간 ‘아나운서를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나운서는 정확한 발음과 발성이 중요한데, 학창시절부터 발음이 좋다는 말을 선생님들께 많이 들었거든요. 예를 들어 ‘의사’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아나운서 가운데도 이 발음을 잘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저는 정확하게 발음했죠. 그렇게 해서 새로운 도전에 성공한 저는, KBS가 1976년 말에 여의도로 이사하면서 1977년 3월 KBS 공사 4기, 역사적인 여의도 1기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한국 여성 최초 아나운서 부장, 실장이 되기까지 ‘유리천장’의 존재감 
 사실 제가 한 회사의 국장급 정도인 아나운서 실장, 부장을 여성 최초로 올랐을 때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진 것을 보더라도, 방송분야가 얼마나 보수적인 조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신문사인 한국일보는 여자 사장이 나올 정도였지만, 방송은 지금도 여성 CEO가 없습니다. 사회적인 제도의 장벽은 개인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혼자서 깨지 못해요. 사회 전반의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변화하는 시점이 저와 맞았다고나 할까요. 무엇보다도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제가 방송을 시작할 당시 여자 아나운서들에겐 ‘유리천장’이 아닌, ‘떡하니 보이는’ 꽉 막힌 천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자 아나운서들은 회사규정에도 없는 나쁜 관습을 따라, 결혼과 동시에 다들 눈물을 머금고 방송을 그만두어야 했죠. 여성앵커 1호인 박찬숙씨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12월, 방송사 통폐합이라는 엄청난 혼란 속에 이 잘못된 관행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언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어요. 더구나 통폐합으로 다른 방송국에서 결혼한 아나운서가 들어오기도 했고요. 이렇게 결혼한 여자 아나운서의 수가 많아지면서,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떠나야 하는 나쁜 관행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또, 저희 때만 해도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는 앵커들은 거의 남자였습니다. 라디오 역시 상징성을 갖는 정오 뉴스는 여자가 할 수가 없었습니다. 12시부터 15분 동안 전국으로 나가는 뉴스는 반드시 남자가 하고, 그 이후 5분 동안 진행하는 지역뉴스만 여자가 담당했습니다. 여자가 뉴스를 진행하면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 때문이었죠. 제가 2008년 즈음 실장 발령을 받은 후, 2년 동안 이런 성차별의 틀을 깨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0년 동안 대한뉴스의 나래이션을 맡다! 
 1985년부터 1994년 12월, 대한뉴스가 없어질 때까지 10년간 대한뉴스의 나래이션을 했습니다. 김승한 선배 아나운서부터 시작해 5명의 남자 아나운서들과 함께 방송을 진행했죠. 85년 이전의 대한뉴스는 남자 아나운서만 했는데,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자 아나운서와 같이 진행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방송을 맡게 된 것이죠. 
 1980년 12월, 방송 통폐합이 되면서 TV방송은 KBS와 MBC 두 개만 남게 되었는데, 대한뉴스는 정부의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유용한 홍보수단이었습니다. 극장에 오는 모든 사람은 대한뉴스를 봐야만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비난도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록방송으로 남게 되었죠. 사람들이 ‘아~ 그때는 이렇게 살았구나’를 알 수 있도록 우리나라 현대사를 고화질 영상으로 기록하는 순기능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요즘 유튜브에 대한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유튜브, 1인 방송 채널의 홍수 속에 아나운서 역할
 ‘홍수가 나면 오히려 마실 물이 귀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다매체, 다채널의 홍수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마실 수 있는 청정한 물의 역할이 더욱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기본적으로 아나운서들은 입사와 더불어 바른 한국어, 표준한국어 교육을 받습니다. 특히 인간의 ‘사고’와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매일 듣는 공공매체의 방송이 언어의 순정성을 가질 때, 듣는 사람의 품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것과 같죠. 계속 욕설을 하며 거친 말로 기른 아이들과 존댓말을 사용하고 기른 아이들은 성품 자체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NHK를 일부러 틀어놓는다고 합니다. 언어교육상으로 아이들이 표준 언어를 듣고 자랄 수 있도록 말이죠. 아나운서 중에 생명력 있게 오래가는 사람들은 거친 말보다 교양 있는 표준 언어를 구사합니다. 대표적으로 예능 방송인 유재석씨 같은 경우는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는 진행자라고 할 수 있죠. 품위 없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온 세계에 이산의 아픔과 슬픔을 전한 1983년 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아직도 마음이 아린 가슴 아픈 방송은 1983년 6월 30일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입니다. 저희 부모님들도 이북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에 이 방송을 할 때 더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지만,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해결되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 있었으니까요. 1983년 즈음 TV 보급률이 천만 대를 돌파해, 가정마다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서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가능했던 방송이었습니다. 원래는 95분 정도 진행하려고 기획한 특집방송이었는데, 무려 138일 동안 방송이 진행되었죠. 시청자들에게 봇물 터지듯 연락이 왔습니다. “알아봐 주세요. 누구인 것 같아요…”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겪은 우리뿐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도 함께 이산의 아픔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습니다. 

 

 방송에 출연한 5만 3536명의 이산가족들을 위해 아나운서들은 현장에서 교대로 조를 짜서 조근(6시~14시), 야근(14시~22시), 숙직(밤샘), 일근(9시~18시), 이렇게 계속 돌아가며 4교대 근무로 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아나운서들이 직접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식수 안내도 해야 했죠. 이때 방송을 함께 했던 KBS 2년 후배인 황인호 아나운서가 참으로 말을 예쁘게 했습니다. 찾아야 할 이산가족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애꾸눈이고, 곰보”라고 하면, 이 표현을 “한쪽 눈이 불편하고, 얼굴이 얽었다”고 바꾸어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순화시켜 표현한 것이 한동안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의 표현에 대한 언어순화, 인식의 변화 등을 고취 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2015년에는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올림픽을 치러?”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올림픽을 치러?”하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올림픽 중계를 하려면 그 나라 주간 방송사가 국제신호를 제작해 각 참가국에 다 보내주어야 합니다. 당연 우리나라는 KBS가 88올림픽 때 160개국에 국제신호를 보내야만 했죠. 우리나라에 직접 오지 못하는 각 자국 아나운서들이 이 신호를 받고 부스에 들어가 중계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육상종목이면 육상신호를 받아 바로 그 자리에서 아나운서가 중계를 해야 하는데, 특히 100m 경기는 8~9초 안에 끝나는 기록경기이기 때문에 국제신호가 중요합니다. 그 당시 미국의 주간 방송사인 NBC의 부사장이 올림픽 때 중계 단장으로 왔는데, 우리를 못 믿겠으니 국제신호를 자기네들이 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우리가 하겠다”라고 부사장을 설득한 뒤, 온갖 노력 끝에 KBS가 실수 없이 제작해서 성공적인 중계를 했습니다.

 온 국민과 하나 되어 올림픽을 치러내다! 
 1981년부터 8년을 준비해 드디어 88올림픽이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치렀다는 사실이 기적 같습니다.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방송을 해야 하는 KBS도 철저히 대비를 했습니다. 특히 화면에는 아나운서나 중계방송 하는 사람 몇 명만 나오지만, 그 뒤에 수많은 기술적 배경과 시스템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엔지니어 선배들이 고생한 것을 꼭 얘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거든요. 무엇보다 88올림픽이 한국 방송기술과 방송 산업에 있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남자의 서브(sub)가 아닌, 1990년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스포츠 중계, 여성 최초 단독 진행 
 그 당시 스포츠 중계를 할 때 여자 아나운서는 메인이 아닌, 구색 갖추기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 세계피겨선수권대회 피겨스케이팅 중계 1호로 단독 방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방송영역에 있어 다른 여자 아나운서보다 다양한 활동을 한 편입니다. 뉴스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방송 DJ, TV ‘비엔나신년음악회’중계 10년, 정부 차원의 8.15광복절 사회, 외부행사 등으로 종횡무진 뛰어다녔습니다. 이런 활동 속에서 자기 직종의 전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알게 되었죠. 

 전문성을 향한 도약
 1994년, 차장 승진을 하면서 청주 아나운서 방송부장으로 지역근무 1년을 했습니다. 이 당시 여자 아나운서로서 한차례 도약을 해야 했기에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그러면서 저의 브랜드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미국 UCLA의 extension 3개월 연수과정에 지원을 했는데 뽑히게 되었죠. 어학연수를 하며 야간에는 방송저널리즘 강의를 한 학기 들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제겐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이전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제가 일하는 일터의 조직을 보게 되었죠. 무엇보다 20년 방송 생활과 함께 너무 안이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과 일방적인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보다,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씩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부장직을 수행하며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내친김에 2008년 언론학 박사까지 공부하니, 그해 12월 아나운서실 실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아나운서는 엔터테이너?! 기본적인 아나운서 자세
 아나운서의 수명이 참 많이 짧아졌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나운서를 저널리스트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보게 된 것이죠.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방송영역이 많이 줄어든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나운서는 상당히 복합적인 업무역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공부가 필요한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우리나라 말, 한국어에 대한 기본소양을 적극적으로 닦을 뿐 아니라, 국어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표준발음법, 한국어 어문 규정 등을 꼭 숙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무슨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겠지만, 요즘 아나운서들이 이에 대한 소명의식이 좀 부족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화장을 어떻게 해야 더 예쁘게 나올까를 생각하기 전에 지적이고 내적인 면을 더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저는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국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내가 프로페셔널이라는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있어 시청자들에게 말하는 사람 위주가 아닌, 듣는 사람을 배려하고자 하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론공부를 깊이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인문학 중에서 technology를 기반으로 하는 유일한 학문인 ‘방송학’의 기본 상식은 내가 몸담고 있는 매체에서 활동하려면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아무래도 시청자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뉴스 한 줄을 읽어도 가볍고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미묘한 차이인데도 시청자가 더 금방 알아봅니다. “아! 저 아나운서가 뉴스를 하면 내 귀에 쏙쏙 들어와!, 어떤 아나운서의 뉴스는 전달이 안 돼”라고요. 왜냐하면, 핵심어와 의미에 있어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면서 전달해야 하는데, 뭐가 핵심어인지 모르고, 일상적인 아나운서의 낭독조에 빠져 뉴스를 진행한다면 단순 기술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시사적인 내용, 현재 우리의 가장 중요한 쟁점, 핫이슈가 뭔지를 알고 하루라도 뉴스를 보지 않으면 이미 기한이 지나 버리는(outdated) 상태가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뉴스를 할 때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거든요. 저도 그런 적이 많았습니다. 읽으면서 ‘내가 이걸 뭐라고 읽은 거지?’할 때가 있었으니까요.적어도 내가 읽는 뉴스는 명확히 알고 전달해야지, 기계적인 AI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뉴스 전달자, 외모 아닌 메시지에 집중
 CNN는 처음부터 예쁜 여자 앵커를 뽑지 않습니다. 앵커가 너무 예쁘면 메시지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앵커에게 집중을 하니, 메시지 전달에 있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달자일 뿐이다.’라는 교육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나운서들의 가장 큰 주 업무는 뉴스를 전달하는 거였으니까요. 전에 비해 머리 모양과 복장은 자유로워지고 외모도 연예인 못지않은 여자 아나운서들이 많아졌지만, ‘전달자’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외모가 중심이 아닌,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용을 소화해서 전달하는 아나운서가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저널리즘 보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객관성’
 언론의 종류에는 저널리스트, 뉴스, 시사교양 프로그램 등 다양할 수 있지만 저널리즘 보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건 ‘합리적인 객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KBS도 시청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뉴스를 제공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지만, 시청자라는 집단의 정의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시청자는 연령, 성별, 사회경제적인 지표도 다양하고, 특히 좌우의 정치이념 폭도 굉장히 넓어 다 만족시킬 수는 없기에 객관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가 봐도 ‘음… 그렇군’하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따라서 방송은 신문과는 좀 다릅니다. 신문은 보수, 진보성향을 띌 수 있고, 구독료를 내는 독자의 선택이기에 굳이 독자의 성향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방송은 거의 전 국민이 대상이기에 아나운서도 객관성을 가장 우선적인 덕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36년 가까이 아나운서로 일하며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기억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장이 되기 전까지 19년 동안 라디오 새벽 뉴스를 진행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특히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죠. 다행히 친정엄마가 살림에 두 아이들을 봐주셔서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1993년 KBS에서 오래 근무한 순서대로 지방발령을 냈을 때였습니다. 저는 청주에서 근무했고요. 그곳에 있으면서 아주 지겹고 힘든 승진시험(사회학, 상식, 사규, KBS 정관 등)을 통과 후, 차장이 되어 아나운서 방송국장으로 승진하고 복귀했죠. 그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만둘 위기였죠. 

 강단에 서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제가 대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학생들이 소통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발음, 전달하는 기술도 문제지만, 전달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 달 정도는 이론을 소개하고, 한 달은 말하는 연습, 나머지 한 달은 주제를 통한 3분 스피치를 했지요. 예를 들어 ‘4차산업혁명’을 주제로 3분 스피치를 진행했는데 굉장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온라인 세대의 특징을 다 아시겠지만, 단문으로 소통을 하니 장문을 못 쓴다는 것입니다. A4 용지 1장 글을 쓰는데도 힘들어했죠. 학생들에게 “너희들에게 창작하라는 게 아니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의 바다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것도 중요하니 이 부분을 창의적으로 해봐라.” 이렇게 해도 처음에는 정말 힘들어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에 자신감을 얻고, 강의를 듣고 말하는 것을 배우게 되어 정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피드백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강단에서도 내려와 쉼을 갖고 있다는 박경희 아나운서. 대한뉴스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전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고 있다는 게 저에게도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방송계의 역사적인 흐름을 어찌 다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현대 방송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런 분들의 땀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하며, 몸도 거의 회복되어간다는 말에 도리어 감사하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9>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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