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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후 다시 쓰는 역사의 단상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1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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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이어온 역사 일기]

 77년후 다시 쓰는 역사의 단상

 

   1940년 가을, 강원도 두뭇골 화전민의 아들이 길을 떠납니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두 살 위 아내와 코 흘리게 두 딸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납니다. 소문난 지게꾼, 스무 살 젊은이의 발걸음이 천근만치 무겁습니다. 덜컹대는 도라꾸(트럭) 뒤로 보이는 고향집 산허리가 뿌옇게 흐려져 갑니다. 난생처음 기차를 탔습니다. 고향집 하늘보다 훨씬 넓은 바다를 보고 배도 탔습니다. 잠시 호기심에 빛나던 젊은이의 눈빛은 금새 어두워집니다.

 

  불안... 원치 않은 선택과 기약 없는 미래가 만든 무기력과 두려움의 끝없는 이중주.

 

  부산에서 동남쪽으로 반나절이 걸려 도착한 시모노세키엔 화전민의 아들과 똑같은 눈빛을 한 조선의 젊은이들로 가득합니다. 젊음을 갈아먹고 살쪄가는 검은 도시들, 화전민의 아들은 가이지마 탄광(패도탄광 貝島炭鑛)으로 배정을 받습니다. 큐슈 후쿠오카현(복강현 福岡県)의 내륙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화전민의 아들은 2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아니 반 년 쯤은 지상에서, 나머지는 지하에서 두더지처럼 지냈습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9시까지 좁은 갱도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깨죽과 주먹밥에 늘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쥐꼬리만한 월급은 이발 한 번 하고 나면 바닥이 났습니다. 무너져 내린 석탄에 깔리고 화차에 부딪치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도망가다 붙잡혀 벼룩이 가득한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생명들, 못 다 핀 젊음, 지켜줄 나라가 없는 가련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2017년 5월, 나가사키 현(장기현 長崎県)의 한 작은 시골 마을. 일흔이 넘은 백발의 할머니가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단정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퍼져갑니다.

 

이 이야기는 현재 춘천에 거주하고 계신 98세 고석진 (1920년생)님의 일제강제징용의 경험과

그 아들이 일본에서 만난 은퇴한 초등학교 선생님인 후미요상(76세)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저는 아리타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찾아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오래전 일본에 잡혀온 조선의 젊은 남녀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힘든 일을 하다가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후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기술을 가진 도공들은 일본에서 신(神)으로 칭송되며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은 엄청난 고생 끝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후, 한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립니다.
 

  “저희 아버지는 1940년에 일본 패도 탄광에 끌려와 일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시고 간신히 살아 돌아와 지금 한국에 살고 계십니다. 저는 일본이 이런 저런 이유로 싫고 미웠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한국에서 일본인을 만나 대화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본과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무조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힘을 기르지 않은 잘못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구합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한국을 침략하고 사람들을 강제로 일을 시키고 괴롭힌 것은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무고히 죽어간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일본사람들에게 알릴 것입니다.”

 

  기쁨... 만남과 대화 그리고 정직한 고백이 만들어낸 용서와 화해의 이중주.


 

 

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92호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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