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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토’ 3악장 속의 갑작스러운 음의 무너짐을 추적해 보다

2021년 1월호(13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2. 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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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토’ 3악장 속의 갑작스러운 음의 무너짐을 추적해 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클래식 초짜였던 저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곡이 있었으니, 바로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Triple Concerto in C Major Op.56)’였습니다. 김대진 씨가 지휘자로 있었던 수원시향의 정기연주회 곡이었는데, 우선은 세 개의 악기를 담당한 연주자들의 개성 넘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피아노 연주에 지휘까지 1인 2역을 책임지는 멋진 김대진 지휘자의 모습, 여기에 한 송이 청초한 백합 같았던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붉은 장미, 아니 동백처럼 화려하고 열정적인 연주의 첼리스트는 정말 환상적이었죠. 여기에 베토벤 특유의 역동감 속에 달콤하게 녹여낸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선율 또한, 매력적이었고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은 공연 후 첼리스트와 함께 찍었던 사진만큼이나 생생하게 남아 있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말고도 인상 깊었던 또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제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입니다. 

 

갑작스러운 음의 붕괴_‘잘나가다 왜 이러지?’
조금만 주의 깊게 들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데, 3악장의 후반부 즈음에 갑자기 음들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음에 파투가 났다고나 할까요? 유난히 긴 1악장이 끝나고 짧은 2악장에 바로 이어지는 3악장의 중반부에는 세 악기가 서로를 축복하며 번갈아 무대에 올라 주제 선율을 마음껏 뽐냅니다. 뒤편에서 두 주자의 무대를 참을성 있게 바라보던 피아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 4회 연속으로 솜씨를 뽐내고, 이제는 서로가 알콩달콩 보듬어 가며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목소리로 합쳐지려는 찰나, 갑자기 피아노의 선율이 무너져 내리죠. ‘와르르~’. 산발적인 고통의 신음들이 들리다가, 오래지 않아 바이올린을 시작으로 차츰 음들이 회복되어 마지막을 향해 달려나가는 부분입니다. 곡 전체에서 차지하는 시간적 비중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이 짧고 강렬한 무너짐의 순간은 그 갑작스러운 등장 하나만으로도 듣는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적어도 머릿속에 ‘아니 갑자기 왜 이러지?’라는 질문 하나는 남기니까요. 저는 지금부터 이 질문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베토벤이 왜 이 아름다운 곡 속에 음의 붕괴라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만들어 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여러분과 함께 추적해 보려 합니다.

단순한 음악적 장치?_‘무너짐의 한 방’을 준비한 베토벤의 천재성!
가장 간단한 해석은 음악에 있어 항상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는 베토벤이 만들어 놓은 음악적 장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음악적 장치라고 설명하기에는 이 부분이 곡 전체의 흐름과 너무나 다른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몇몇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대로 같은 시기에 작곡된 걸작들에 비해 느슨한 구조를 갖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또 다른 부정적인 비평 중의 하나인 베토벤 특유의 뚜렷한 절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베토벤 특유의 한 방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그 한 방이 꼭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베토벤이 누구입니까? 청중들(21세기의 우리를 포함한)을 결코 실망 시키지 않는 창조성의 화신이 아닌가요? 그러기에 베토벤이 자신의 천재성을 전체의 흐름을 뒤집어 놓는 짧고 선명한 파격적인 깨뜨림을 통해 드러낸 것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콘체르토(협주곡)는 기본적으로 오케스트라와 독주 악기의 경쟁 관계가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트리플 콘체르토는 3개의 독주 악기가 등장하기에 이들 사이의 호흡과 조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베토벤에게 매우 신선하면서도 힘든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각각의 악기의 특성을 정확히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특히 다른 악기들에 묻히기 쉬운 바이올린의 음역대를 어떻게 잘 살려낼지도 큰 숙제였을 테니까요. 이런 가운데 베토벤은 청중들이 원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한 방이 아니라, 청중들의 뒤통수를 치는 ‘무너짐의 한 방’을 준비한 것이죠. 언제나처럼 오케스트라와 함께 멋진 휘날레로 달려갈 듯하다, 갑자기 주저앉아 버림으로 청중의 단순한 예측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으로요. 이러고 보니, 베토벤의 야릇한 미소가 이 짧은 부분에 담겨있는 것 같지 않나요?

개인적 경험의 반영_ 청각의 문제와 자살소동
두 번째로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3악장의 음악으로 연결해 보는 것입니다. 바로 귀에 이상이 생긴 사건 말이죠. 연주자와 작곡가로 잘 나가던 그는 1787년 처음으로 귀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자존심 강한 베토벤은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1801년에 친구들에게 알리고,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잘 알려진 자살소동을 벌입니다. 그가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청력 상실로 인해 얼마나 큰 좌절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택하는 대신 음악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이후로 놀라운 작품들을 쏟아놓습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을 보면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체’(1802),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1804), ‘교향곡 3번, 영웅’(1803~1804) 등으로, ‘걸작들이 숲을 이룬다’라고 일컬어질 정도였죠. 이 곡들에는 베토벤 고유의 색깔들과 함께 정신적인 위기를 벗어난 베토벤의 심리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사건 후, 1년 뒤에 완성된 ‘트리플 콘체르토’(1803)에는 그의 이러한 개인적 경험과 심리의 변화가 더욱 생생하게 담겨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갑작스러운 음의 붕괴를 통해서 육체적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뿐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이 겪었던 엄청난 좌절과 아픔, 자기 존재의 붕괴와 다시 일어섬의 개인적 경험을 표현했다는 것이죠. 이 짧은 음악의 변화 속에 쓰러짐, 고통의 신음, 안간힘, 그리고 마침내 다시 일어서는 인간 베토벤의 솔직한 모습이 오버랩되어 전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베토벤의 혁명성_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앞의 2가지 해석을 종합하면, 1) 3악장 후반부의 음들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청각의 문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깊이 좌절했던 베토벤 개인의 경험을, 2) 예측을 불허하는 특유의 천재성으로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음악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방식은 엄중한 형식의 규칙성과 명료성을 추구했던 당시 고전주의 풍토에서는 과감한 시도라 할 수 있고, 이후 엄격한 형식 대신 작곡가의 뚜렷한 개성을 강조하여 이성보다는 개인의 정서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던 낭만주의음악의 특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앞서 언급한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가 형식적 치밀함이 부족하다는 부정적 평가는 이러한 베토벤의 낭만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변화의 전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전주의의 정점에 서 있었던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문을 열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살아갔던 역사적 배경과 그의 기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토벤(1770~1827)은 한마디로 혁명적 시대 속에서 자기 인식이 분명한 혁명적 삶을 살아갔던 음악가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전의 교회와 황제의 절대적 권위에 대항하며 이성과 과학을 중요시하는 계몽주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연이은 전쟁들로 인해 귀족 중심의 질서는 자본을 갖춘 중산층으로 넘어갔고,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 프랑스혁명(1789)과 나폴레옹의 등장(1799)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져 나왔습니다. 베토벤은 이러한 시대 정신의 변화를 그의 정신과 음악에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후원자 앞에서 “왕과 귀족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베토벤은 단 한 명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쳤을 뿐 아니라, ‘교향곡 3번’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 영웅의 탄생을 노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철저한 자기 존재의 인식 속에서 음악을 단순히 완벽한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더불어 시대의 명암을 그대로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베토벤의 이러한 혁명적 정신은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개인과 시대의 고민을 음악 속에 자유롭게 표현하는 새로운 낭만주의 음악을 열어젖혔던 것입니다. 옛 시대를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망치를 내리치고 있는 베토벤의 혁명적 모습이 이 짧은 순간에 번뜩이고 있지 않나요?

지난해 12월, 군포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통해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를 다시 들었습니다. 10년 전의 강한 시각적 인상들은 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3악장 음의 무너짐은 신선하게 다가왔고(이것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할 만큼),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의 주고받는 대화는 더욱 따뜻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세 악기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트리플 콘체르토’ 형식은 베토벤의 이 작품 이후 음악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다시 등장합니다. 세 개의 악기와 오케스트라와의 조합이라는 쉽지 않은 음악적 난관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18세기부터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중요시되는 가운데 19세기 전체가 영웅, 아니 독재자가 치열하게 등장했던 시기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서양의 음악은 그 시대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으니까요. 개인과 개인이 고도로 연결되어 있지만, 반대로 더욱 외롭게 고립되어 가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이 곡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천해 드리고 싶은 연주로 내놓으라 하는 연주가들이 참여한 좋은 작품들도 있지만, 정명훈, 정경화, 정명화 삼 남매의 연주를 권해드리고 싶네요. 세 사람의 호흡 못지않게 카메라 구도가 아주 멋지거든요.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010-6378-1349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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