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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2 - 마리나를 거닐며

2021년 3월호(13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3. 1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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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 요트이야기 14]

 

겨울 이야기2 - 마리나를 거닐며

 

한강이 얼었다. 물살을 헤치고 하얀 포말을 만들며 배가 전진해야 하는 뱃길이 꽁꽁 얼어 길이 끊겨버렸다. 화성의 전곡항 마리나에 가서 보니 바다도 마찬가지. 20년 만에 찾아온 추위는 반도 서쪽의 바다와 강, 산과 공기를 온통 하얗게 얼렸다. 냉각수가 얼어 엔진이 깨질까봐 히터를 종일 틀어두고 배 주변의 얼음을 깬다. 배 밖의 세상은 전염병이 돌아 딱히 갈 곳이 없다. 차라리 얼음 위의 배 안에서 차를 끓여 마시며 조용히 음악을 듣고 소일을 하는 자발적 유폐를 택한다. 배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이런저런 수리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배도 나이를 먹는지라 여러 소모품들을 바꿔줘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강한 바람을 지탱하며 4~10톤의 요트를 미는 세일 장구들은 그만큼 강하게 만들지만 자외선에 많이 닳고 잘 부서지기도 한다. 캠클릿을 분해해 베어링을 구해다 수리를 하고 녹슨 고리들을 스테인레스 제품으로 교체한다. 제노아 세일 시트를 새것으로 주문하고 메인세일의 레일 고리를 교체하며 실리콘 윤활제를 뿌린다. 요트 부품들은 국내에선 수요가 부족해 생산조차 되질 않고 저렴한 중국제는 내구성이 약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품들은 영국, 미국 등에서 구하다보니 가격도 그만큼 만만찮다. 그나마 최근에는 해외 직구와 유튜브 등이 발달해 쉽게 요트 부품들을 구매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인데, 10년 전만 해도 인프라가 부족한 한국에서 어떻게 요트를 수리, 유지했을까를 생각하니 먼저 세일링을 배웠던 선배들의 열정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꽁꽁 언 전곡항


강릉의 김 선장님이 새 요트를 구한다고 해서 1월 초에는 한파 속에서 통영, 여수, 화성 등을 함께 다니며 배를 보았다. 10년간 이맘때면 해외에 나가 한 달 살기를 하다 돌아왔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그마저 여의치 않아 배를 구경한다는 핑계로 겨울의 서해, 남해 바다를 찾아가 갑갑함을 달랬다. 돌아다니며 배들을 보니 안타까운 상황이 많다. 집이나 요트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 금세 망가져 배 안에 곰팡이가 피거나 쓰레기장이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치된 채 배 바닥과 계류줄에 덕지덕지 미역과 톳을 기르는 가장 비싼 양식장이 된 배들. 이 배들을 사며 처음 선주들이 꾸었을 바다의 꿈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무엇을 핑계로 한 번뿐인 생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우리의 오랜 꿈들을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 돛을 올리지 못하고 파도에 뒤채며 방치되고 있는 배들이, 곧 누군가가 꾸었던 이루지 못한 꿈의 흔적들 같아 심란했다. 이제껏 만나 뵈었던 여러 선장님들을 보니 세일러로의 은퇴 시기는 대략 70대 초중반쯤이었다. 체력적인 이유로 배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대양을 건너는 꿈을 꾸기 쉽지 않아 이후에는 큰 배를 팔고 작은 배로 바닷가와 강가에서 말년을 보내시는 것 같았다. 나이 드신 선장님들을 뵈며 거울을 보듯 나의 노년을 상상해 본다.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들이 당연히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안되겠구나. 가능한 여행의 시간은 이제 30년 남짓.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떠나고, 기회가 있을 때 더 많이 바람을 타며 가닿지 못한 세계와 낮은 조도의 달빛을 비추며 환하게 빛나던 아름다운 대양의 밤바다를 더 많이 보러 다녀야 하는 것이구나.


코로나19와 한파로 심신이 움츠러드는 차가운 겨울이지만 겨울이 겨울다우니 그 맛과 멋도 무척 매력 있다. 꽁꽁 얼어버린 마리나와 한강을 이처럼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도 처음이고 얼음 위에 흰 눈이 쌓여 햇볕에 반짝이는, 말 그대로‘눈이 부신’풍경들도 무척 아름답다. 사진기를 꺼내 이 또한 지나갈 겨울의 풍경을 기록해 둔다. 지난 계절에 풍성하게 찍어둔 사진과 영상들을 꺼내 보면 그때 그 바다, 강의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그러면 지금의 살을 에이는 추위들이 그리 힘들지 않다. 묵묵히 봄은 눈부신 4월과 5월에 또 찾아올 것이고 나는 바람을 타고 한강과 서해바다에 나가 골든 타임의 햇볕과 노을, 푸른 자연을 또 맞이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이 겨울의 꽁꽁 언 마리나 풍경들이 또 그리워지겠지. 이런 상념들로 2021년의 봄을 준비하며, 차가운 겨울의 시간들을, 다가올 그리움의 깊이를 가늠하며 보내고 있다.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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