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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내공, 대한민국 1호 조율 명장 ‘이종열’님을 만나다

2021년 4월호(13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4. 7.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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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65년 내공, 대한민국 1호 조율 명장
‘이종열’님을 만나다

 

출처 : KBS1

 

할아버지의 시조 소리를 듣고 자란 어린 시절
저의 집안은 완주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할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는데, 시조를 아주 잘 부르셨어요. 제가 소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는데, 할아버지는 동네 분들을 집으로 초대해 ‘청산리 벽계수야~’하며 직접 시조를 가르치셨죠. 덕분에 오고 가며 시조를 귀 넘어 얻어들을 수 있었죠. 이때부터 음악과 소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음악 시간이 제일 좋았습니다. 학교 건물이 목조 건물이라 다른 교실의 음악 시간에 들려오는 노래를 다 듣고 외울 정도였죠. 아버지도 할아버지께 시조를 배우셨는데, 노래를 워낙 좋아하셔서 라디오에서 가요가 나오면 떠날 줄을 모르고 듣곤 하셨죠. 할아버지부터 저까지 3대 모두가 음악에는 어느 정도 소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소로 시작한 최초의 조율
할아버지께서 시조뿐 아니라, 대나무로 직접 단소를 만들어 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학생이 되면서 직접 단소를 만들기 시작했죠. 저는 궁상각치우 오음계만 내는 할아버지의 단소와는 다르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불 수 있는 단소를 만들었죠. 일종의 서양음계 단소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손가락으로 편안하게 구멍을 막을 수 있고, 소리도 잘나는 단소를 만드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대나무의 굵기와 길이를 잘 보고 잘라야 하는데, 무엇보다 구멍의 간격과 크기를 조정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구멍의 간격이 너무 멀면 손가락으로 구멍 막기가 어려워지고, 좁으면 표준 음높이를 만들 수가 없죠. 여기에다 구멍이 작으면 소리가 어둡고, 구멍이 크면 소리가 밝아지는데, 실수로 너무 키우면 손가락으로 다 못 막아 공기가 새기도 했죠. 이렇게 연구를 거듭해 단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내 생애 첫 번째 조율이었던 거지요.

풍금과의 운명적인 만남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내 인생을 바꿀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친척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이셨던 할아버지께 혼이 날까 걱정도 되었지만, ~을 준다는 친척의 간절한 권유에 몰래 교회에 가게 된 것이죠. 그곳에서 풍금을 보게 되었습니다. 학교에도 풍금은 있었지만, 음악 시간마다 교무실에서 가져와 끝나면 도로 가져다 놓고 해서 전혀 만질 수 없었어요. 그런데 교회는 자유로워 예배 끝나고 혼자 앉아 풍금을 쳐볼 수 있었어요. 풍금은 그동안 불었던 단소나 하모니카와 달리 정확한 화음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풍금에 완전 빠져버렸죠. 오로지 풍금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책방에 가서 ‘오르간 교본’을 사와 독학을 했습니다. 손에 테크닉이 어느 정도 붙기 시작할 즈음, 풍금을 가지고 장난친다고 할까봐 얼른 찬송가 연습을 했습니다. 당시 교회에 반주하는 집사님이 계셨는데 멜로디에 옥타브만 첨가한 단조로운 반주를 했어요. 하지만 제가 악보대로 4부로 치니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났죠. 여기에 매료가 되어 헤어날 수가 없어 방학 동안에 바이엘 교본을 사서 연습을 했습니다. 앞부분은 쉬워 괜찮았는데, 책 뒷부분으로 갈수록 건반이 부족했죠. 그러다보니 치는 것이 재미가 없더라고요.  

지상최대의 과제를 만나다
이렇게 해서 원하던 풍금을 마음껏 치게 되었는데, 화음을 많이 듣다 보니 똑같은 3도 화음인데 어떤 것은 깔끔하고 안정된 소리가 나는 반면, 건반의 어떤 부분에서는 와글와글하고 거친 소리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좋은 화음과 좋지 않은 화음을 구별할 수 있는 귀가 열린 거지요. 불안정한 풍금 소리에 불만이 생기게 되자, 제대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싶은 강한 열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물리책을 사서 소리의 원리를 연구하고, 뭐든지 만들어 사용했던 습관대로 풍금 뒤의 뚜껑을 열어서 리드를 빼내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여기저기 차례차례 건드려 보니까 소리가 변하는 게 들렸습니다. 풍금의 소리에 대한 지식이 생기자, 무턱대고 도에서 솔, 솔에서 레, 이렇게 4~5도씩 연결해 음을 맞춰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율한 마지막 음과 처음 음이 딱 맞아야 하는데 완전히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예요. 온갖 별스러운 방법을 동원해 음을 맞추려고 했지만, 불협화음이 이리저리 옮겨 다닐 뿐 잡을 수가 없었죠. 예배당 풍금을 망쳐놓았으니, 큰일 난 거죠. 그때부터 이 문제 해결이 저의 지상과제가 되었습니다. 혹시 도서관에 조율과 관련된 책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답만 돌아왔죠. 또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학교 음악 선생님께 물어볼 용기도 없었죠. 혼자 끙끙 앓다가 시내 악기점에 가서 풍금 맞추는 것 좀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보아하니 학생인데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혀!”라는 야단만 맞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고민을 들은 친구가 “그 풍금이 일본제잖아. 일본에 그런 책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말에 책방으로 달려가 일본 책 목록집을 뒤져서 드디어 ‘조율’이라는 한문으로 적힌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났죠. 그리고 마침내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설득해 원하던 책을 주문했습니다.

평균율과의 만남
그런데 문제는 책이 도착해도 제가 일본말을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책을 주문하고 돌아오는 길에《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일본어 독습책을 사서 혼자 배우고 쓰고 읽으면서 공부를 시작했죠. 그렇게 준비해서 드디어 기다리던 책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다, 논두렁에 앉아 궁금했던 부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궁금했던 불협화음이 밀려다니는 이유를 알게 되었죠. 조율에는 ‘평균율’과 ‘순정률’이 있는데 제가 그동안 고민했던 것은 ‘순정률’이었죠. 순정률로 조율한 몇 개의 화음은 정말 아름다운 화음을 내지만, 그 화음 때문에 다른 음이 희생되어 나머지 음은 쓸 수가 없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유명한 고대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음계를 연구하다가 이 문제에 봉착하여‘피타고라스 콤마’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였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타고라스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평균율’이었습니다. 밀려다니는 콤마, 즉 차이 나는 음을 한 옥타브의 열두 음이 똑같이 나누어 갖게 하는 거였죠. 이를테면 도에서 솔 음을 맞출 때 완전하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12분의 1만큼 솔 음을 낮추어 미세한 양 만큼씩 양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메르센느라는 수학자가 고안한 것으로 한 번 조율해서 모든 조를 연주해도 불편하지 않은 고른 화음의 조율방법이었습니다. 논두렁에 앉아 깨달음을 얻고 예배당에 가서 책에 쓰인 대로 했더니 원하던 음이 딱 나왔습니다. 드디어 해냈다는 감동으로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죠. 풍금을 배우고 조율을 연구한 지 여섯 달 만에 평균율 조율을 터득해 낸 것입니다.

풍금 수리 활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풍금 조율에 자신이 생긴 저는 이웃 교회에 풍금을 고쳐주며 다니다가 1959년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대에서도 풍금을 만지고 싶어 교회에 갔다가 반주자가 되어 조금은 편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과제를 만들어, 첫 번째 휴가 때 일본에서 온《피아노의 구조, 조율, 수리》책을 부대로 가져가 밤낮 12일 만에 번역해냈습니다. 잉크 찍어 쓰는 펜으로 군대 필체로 쓴 팔절지가 지금은 종이가 삭아서 부스러지기에 비닐 파일에 보관하고 있죠.
이걸 책으로 만들어 팔았으면 인기가 많았을 거예요. 제대하고 나니 빈둥빈둥 놀 수 없었던 저는 화학 전공을 살려 비료공장을 갈 건지,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피아노 조율을 할 것인지 고민하다 시내 악기점에 취직했습니다. 이제는 취미나 봉사가 아니라, 직업으로 조율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피아노의 구조, 조율, 수리》일본 책을 군대전용 용지에 펜촉을 사용해 12일 만에 번역

 

서울로 진출하다
1963년 지인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수도피아노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2년 반을 일했는데, 조립부에 들어가 일하면서 피아노에 대한 구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노동쟁의 문제로 수도피아노사를 나와, 바로 삼익피아노 영업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조율사로서 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죠. 저는 다른 조율사와 달리 풍금으로 연주를 했던 실력이 있어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조율을 다 끝내고 듣기 좋은 ‘소녀의 기도’나 ‘은파’ 같은 달콤한 곡을 쳐서 음을 점검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고객들에게 인상을 주었던 것이죠. ‘저렇게 피아노를 잘 치니까, 조율도 잘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입소문이 났고 저를 많이 찾게 되었죠. 그런데 인기가 많다 보니 질투도 따라 왔습니다. 다른 조율사들이 너무 잘난 척하고 다니지 말라 하기도 하고, 나를 찾는 고객들의 집에 다른 사람을 일부러 바꿔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아, 소신껏 성실하게 살면 세상이 알아주는 거구나. 그러면 정말로 열심히 하자. 질투하는 사람들 무서워서 내가 대충할 수 없지 않은가’하고요. 하지만 점점 더 인기가 많아지고 바빠지는 가운데 회사에서는 영업부에서 저를 다른 직매점 판매원으로 인사발령을 냈고,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다는 생각에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퇴사하고 시간이 여유가 생겨 조율에 더 집중할 수 있었는데, 피아노를 정말로 예쁜 소리가 나게 만들어 주니 소문에 소문이 나서 일류 피아니스트들이 전부 제 고객이 되었습니다. 1971년부터 십여 년을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차가 필요해졌죠. 하루에 조율한 피아노 한 대 값을 택시비로 사용했습니다. 한 달 통계를 내 보니 차 운영비와 맞먹어요. 그래서 1980년에 포니 차 한 대를 마련했는데, 피아노 조율사가 자가용을 몰고 왔다며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죠.

세종문화회관 조율사가 되다
시간이 흘러 서울 시내에 있는 음대 교수들의 피아노 조율을 100퍼센트 제가 맡아서 하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분들이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피아노 조율이 맘에 들지 않아서 연주자들의 여론 수집을 통해 조율사로 저를 추천했습니다. 요리사로 치자면 유명 호텔의 주방장이 되는 것처럼, 조율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설렘도 잠시,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대선배를 밀어내고 내가 올랐다는 말과 특혜를 받았다는 말들 속에도 저는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조율사에게 있어 무대 피아노 조율은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연주에 무슨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연주 끝날 때까지 긴장해야 합니다. 피아니스트가 연습해 본 뒤, “원더풀!”하고 그대로 연주할 때도 있지만, 이쪽 소리가 더 밝아야 한다, 이쪽 소리가 더 부드러워야 한다, 건반 깊이를 얕게 해 달라, 무겁게 해 달라 등등 주문이 다양할 때도 있죠. 이번에는 또 무슨 주문을 받아 힘들어질 것인지를 생각하면 초조해집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꼭 내 자식이 나가서 연주하는 것 같고요. 연주가 끝날 때까지 조율한 피아노가 안녕하기를 뒤에서 기도하고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하죠. 

세계 최고의 조율사를 꿈꾸다
처음에는 독학해서 이왕 조율의 길로 들어섰으니 한국에서 최고의 조율사가 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세종문화회관의 조율사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외국의 유명한 연주자들을 접하면서 한국에서 최고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을 상대하려면 세계 최고수준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저는 모든 걸 독학으로 배워왔기에 내가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외국 전문서적을 사서 연구하고, 기회가 되면 독일, 이탈리아, 영국, 미국과 같은 조율 선진국들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여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과연 내 방식이 맞는 것인지도 확인하고 왔습니다. 조율을 제대로 하려면 완전히 미쳐야 합니다. 미치지 않고는 성공할 수가 없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선진국의 100을 보러 가려면 90은 알고 가야 나머지 10을 볼 수 있어요. 자기가 50짜리면 100을 봐도 그냥 지루하기만 하고 소득 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돌아오게 되죠. 무엇보다도 나가서 배운 것은 시간 단축은 되겠지만 스스로 연구하다가 깨닫는 게 더 큰 기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저는 이전에 샀던 책들을 펴서 다시 읽기도 하고, 작은 공작실에서 공구를 만들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저만의 공구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죠. 

 

전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종열 명장이 만든 조율 도구


지메르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다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장마다 가지고 다니며, 직접 조율하는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2018년 두 번째 내한 공연을 왔을 때의 일입니다. 2003년에 이미 조율을 맡아 칭찬까지 받았지만, 다시 지메르만의 조율을 맡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서 미리 그의 연주곡 CD를 사서 들어보며 그의 음악의 색깔에 맞춰 피아노 하나를 조율해 놓았습니다. 당시 공연장에 네 대의 피아노가 있었는데 다 조율할 수 없어 남성다운 음색을 내는 피아노 하나를 골라 세심하게 조율한 것이죠. 그리고 연락이 왔는데, 연주회 당일 8시에 피아노를 고르러 오겠다는 것입니다. 연주장에서 일한 50여 년 동안 아침 8시에 피아노를 고른다는 피아니스트는 처음이었죠.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그가 어떤 피아노를 고를지 숨죽여 지켜보는데, 내가 골라 조율한 피아노를 선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소리 죽여 안도의 탄성을 질렀죠.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담배는 전혀 안 하고 술도 아주 적당히 합니다. 무엇보다도 조율사는 귀가 중요하기에 큰 소리 나는 곳은 가지 않고,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소리를 잘 듣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리의 차이를 예민하게 구별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정음(整音)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음악적 감각으로 조율 작업 전후의 소리 변화를 감지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기계를 보고 조율하는 방법도 있지만, 소리의 아름다움은 계측기로 측정하거나 수치로 표시할 수 없고, 같은 음색이라도 연주자의 취향과 감성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다를 수 있기에, 음악적으로 예민한 귀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 죠.

조율의 비법
‘조율은 예술’입니다. 그냥 물감 대충 발라서 미술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먼 훗날 명화로 남으려면 그만큼 혼신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조율에서는 작은 것에 충실한 것이 중요합니다. 후배들은 해머의 어디를 어떻게 바늘로 찔러야 좋은 소리가 나느냐고 묻지만, 한 방 뚫어서 좋은 소리가 나면 다 그렇게 하겠죠. 똑같이 하더라도 사람마다 결과가 다릅니다. 결과는 조율사가 쌓아 온 노력만큼 나오는 것이고, 오늘 최고의 비법을 배웠다고 해도 내일 그대로 안 될 경우가 많습니다. 조율사 중에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사람이 90퍼센트입니다. 여기서 장인이 되느냐 아니냐가 갈립니다. 대충 음을 쳐 보고 화음을 눌러봐서는 테스트가 안 됩니다. 피아니스트처럼 피아노를 연주해 보면 이 피아노에 뭐가 필요한지 의사가 환자 보듯 처방이 나오죠. 피아니스트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피아니스트가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훌륭한 조율을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조율사로 살아왔어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조율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후퇴하게 되는 것이죠. 

 

스스로의 노력과 연구를 통해 피아노 조율이라는 한 우물을 깊이 파 내려간 이종열 조율 명장님의 모습 속에서 최고 전문가로서의 여유와 자신감뿐 아니라, 언제나 겸손하게 배우고 발전하려는 자세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으로서 국위 선양과 후배 양성에 힘쓰는 이종열 명장님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 이종열 명장 > 
·1938년 전주 출생
·1956년 피아노 조율 입문
·수도, 삼익피아노사를 거쳐 프리랜서 조율사로 독립
·세종문화회관, KBS홀, 호암아트홀, 국립극장 등 주요 컨서트홀 조율
·현재 서울 예술의전당, 롯데콘서트홀 수석조율사로 재직 중
·한국피아노조율사 협회고문, 튜닝아트대표
·(사)한국피아노 조율사 협회 교재편찬위원으로 《피아노의 조정》,《피아노의 정음》출간
·2007년 산업자원부 피아노조율부문 명장1호 선정
·2019년《조율의 시간》출간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8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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