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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육조거리, 서울시청사 지하 군기시터(軍器寺址) 문화유적을 직접 발굴한 고고학자 ‘박준범’을 만나다

2021년 10월호(14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10. 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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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광화문 육조거리,
서울시청사 지하 군기시터(軍器寺址) 문화유적을 
직접 발굴한 고고학자 ‘박준범’을 만나다

 

 

12년 동안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를 발행하며 고고학자를 인터뷰 한 적은 없었습니다. 여름 땡볕이 수그러질 즈음, 설레는 마음으로 박준범 고고학자를 만나러 가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죠. 조선시대 광화문 육조거리 발굴현장을 직접 둘러본 후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데, 비 때문에 발굴현장을 모두 덮어 보호해야 하니 아쉽게도 보지 못했습니다. 못내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대신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 고고학자 박준범 선생님의 생생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드리려 합니다.

 

 

 청소년 때 고고학자를 꿈꾸며
저는 원래 국사를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순진하게 시골학교 선생님이 꿈이었죠.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하얀 실을 띄워놓고 유적을 발굴하는 장면을 보니 너무 멋있는 거예요. 결정적으로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 “조선왕조실록도 번역이 다 되지 않았으니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전공을 해봐라”하는 말에 힘을 얻고 진로를 정했죠. 

‘한창균’ 교수님과의 만남
저의 스승은 우리나라 처음 구석기 고고학을 하시고, 공주석장리를 발굴한 손보기 선생님의 제자인 한창균 교수님입니다. 프랑스에서 구석기 고고학 공부를 마친 후, 1986년 단국대학교로 오셨죠. 아직 제자가 없으셨던 터라, 87학번인 저는 강의가 끝나면 교수님 계시는 박물관에 항상 올라가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 3학년이 될 때까지 고고학, 불교미술사 등을 종횡무진 공부하면서 고고학과 미술사가 똑같은 줄로 알았어요. 왜냐하면 발굴을 통해 선사고고학이나 미술사를 만났거든요. 무엇보다 단양적성비, 충주고구려비 등을 발견했던 팀들이 단국대 사학과에 있었고 불교미술사가 주류였어요. 

선사고고학을 택하다
대학 3학년부터 선사고고학으로 영역을 정한 후 지금까지 왔습니다. 고고학은 선사고고학, 역사고고학이 있는데, 역사고고학은 문자가 있는 시대를 연구합니다. 그래서 문헌을 증명하는 도구로 문자를 많이 사용하죠. 반면 선사고고학은 문자가 없는 시대로 옛 지형이나 지리를 찾아 선사시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입지나 환경 등을 확인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굴하다 보면 청동기집터나 구석기시대 석기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한 시대를 연구하는 게 아닌, 틀이 없는 좀 더 자유로운 시대가 제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에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오늘날에 와서 다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문, 문헌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또 해석을 a로 하느냐, b로 하느냐, c로 하느냐에 따라 완전 달라지니, 해석 싸움도 해야 하지요. 하지만 선사시대는 지형, 지질, 고기후, 고환경, 석기 재질 등 자연과학과 협업을 통한 연구가 많아 좀 더 합리적인 고고학 해석을 할 수 있어 제게는 매력적인 공부라 생각했습니다.


직업으로서 고고학
우리나라에서 직업 고고학자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 분묘까지 다 발굴할 줄 알아야 해요. 프랑스, 미국, 호주, 영국에서는 유적도 많고 발굴 예산도 충분히 지원해 주기 때문에 구석기 등 고고학의 한 분야를 전공하면 평생 그 전공 분야만 조사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반면 한국은 고고학자라 해도 대부분 구제발굴(개발을 하기 위해 먼저 시행하는 발굴)을 하기 때문에 유적을 조사하려면 경쟁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학술비 등이 지원되는 경우가 별로 없어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구석기만 하고 싶다고 구석기 전공만 고집하면 딱 굶는 거죠.(웃음) 유적이 나왔을 때 구석기든, 신석기든, 산성이든, 절터든, 건물이든, 조선시대 민묘든 다 발굴할 줄 알아야 해요. 이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대학 시절 방학 때 화장품 회사인 피어리스 아미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한 게 인연이 되어, 1994년 학예연구원으로 입사를 했습니다. 저희 선배들도 이곳에 취업한 적이 있었지만, 다들 6개월, 1년도 못 채우고 그만두었어요. 선배들은 자기 전공인 기와, 토기, 구석기, 신석기 이렇게 한 우물만 파려 했죠. 저는 대학 때 선사시대를 공부했더라도, 피어리스 박물관에 근무하며 도자기를 비롯한 고고미술품, 현대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접하게 되어 좋았습니다.

유물을 다루는 훈련
박물관에 유물이 들어오면 그것이 어느 시대 것인지 스스로 공부를 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또한 유물의 기술, 기능 등의 내용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대학1학년부터 지금까지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 박물관은 여러 자문위원이 있어 박물관에 자료가 한 번 걸러져 들어오지만, 보면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눈도 길러야 하고, 가짜면 왜? 가짜인지도 알아야 하지요. 선배들은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 현대미술을 보고 있다며 기업 박물관에서 일하는 저를 싫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장에 가기 위해서는 이런 훈련도 중요하다 생각했고 많은 경험을 위해 미술전시회, 현대음악, 클래식 음악 등도 열심히 들었지요. 대학 때 발굴한 토기, 신석기, 청동기의 많은 유적들을 학교 박물관으로 가져와 정리하는 것을 도맡아 한 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완전 진품이기에, 직접 닦고 만지며 사진을 찍듯이 다 외웠었죠. 또 선배들을 통해 불교미술, 불상, 사찰, 절 등의 미술사를 배울 수 있던 것도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문화유산 ODA사업일환으로 아프리카 콩고국립박물관 건립사업중 현지연구원들과 유물정리


30세,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30세에 석사학위를 받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질문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IMF로 회사가 부도나 정리를 해야 하기도 했지만, ‘30세가 되어도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나?’, ‘기업 박물관으로 좋은 유물과 좋은 환경에 있지만 회장님 재산 지켜주는 일 밖에는 아니지 않나?’, ‘난 발굴이 하고 싶어 고고학을 전공했는데…’ 현장을 못가는 괴로움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때마침 98년도부터 많은 발굴조사기관들이 생겼어요. 대학에서 발굴을 하다보니 학생들이 수업보다, 발굴현장에 자주 다니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죠.

신나게, 발굴을 하다
조선대학교 박물관에서 4년 정도 근무를 하고, 2002년 문화재청 특수법인인 한국문화재단으로 옮긴 후, 서울, 인천, 경기 등에서 2004년까지 3년 동안 정말 신나게, 원 없는 발굴을 했습니다. 주로 인천 검단, 원당 등 신도시의 개발지역 유적 조사를 많이 담당했습니다. 

유적 발굴기준
2004년,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어 민간인 또는 민간기업이 3만 평방미터 이상을 개발하게 될 때에는 무조건 지표조사를 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단위 아파트를 짓기 전에는 꼭 절차에 따라 문화재 조사를 해야 하고 때로는 정밀발굴조사까지 진행해야 하죠. 선사시대, 역사시대 사람들도 어디에 가면 물고기가 많고, 볕이 잘 들어 농사가 잘되고, 적들을 조망하기 좋은 땅인지, 심지어 자기가 묻힐 땅의 입지까지도 알아보는 전략들이 있었어요. 시대만 다를 뿐이지 생각은 우리와 비슷하죠. 이점을 감안해 아파트를 짓기 전에 발굴을 하면, 옛날 청동기, 통일신라시대의 집터가 꼭 나옵니다. 군포시 당동도 신도시 발굴 때 청동기시대 유적이 쫘~악 나왔어요. 일단 유적을 발굴한다는 건 땅을 파는 건데, 결과적으로 유적이 훼손되는 것이죠. 역사가 훼손되기 때문에 훼손된 과정을 얼마나 잘 기록 하는지가 관건입니다. 물론 유물도 잘 수습해야 하고, 유물도 어떤 과정으로 여기에 묻혔는지 확인하는 작업도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고고학은 수술이다!
저는 ‘고고학은 수술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고고학의 연구방법은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진행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의사들과 똑같아요.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바로 수술하지 않죠. 예진, 촉진, 청진, 타진 등을 하는데 이게 지표조사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현장에 갔는데 깨진 토기 조각 유물들이 있고, 무덤 같은 게 있을 때 여기는 어느 시대일 거라고 예진하는 거예요. 지표조사를 통해 어떤 유적이 있을 거라 판단 후, 결과가 나오면 바로 수술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분석을 해야죠. 엑스레이를 찍듯이 표본과 시굴조사를 해서 칼로 째듯 땅을 한 번 파보는 거예요. 표본조사는 전체범위 2%, 시굴 조사는 전체범위에서 10%의 땅을 파서 발굴현장에 유적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물론 없을 수도 있죠. 이렇게 어디를 표적해서 수술해야 하는지 정해지면 최종 수술인 정밀발굴조사를 합니다. 

 

구석기를 알아볼 수 있는 나만의 능력
3년 정도 발굴하면서 비로소 고고학자로서 제 꿈을 찾게 되었어요. 그것은 첫째 구석기시대 우리 민족의 표본이 되는 인류화석을 찾는 거였죠. 두 번째는 경주의 고분을 발견해 금관 등을 꼭 발굴하고 싶었습니다. 세 번째는 서울에 있는 구석기 유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구석기유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인류화석을 찾거나 경주를 발굴하는 것은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일 가능한 것은 서울에서 구석기 유적을 찾는 건데 2001년부터 용인, 성남 등에서 구석기 유적을 찾으며 서울에도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구석기 전문가가 많이 없었고, 중요한 것은 구석기 석기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죠. 10만 년, 20만 년 전이 구석기인데, 인공적으로 사람이 뗀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 구분해내는 일은 훈련이 없으면 못합니다. 저는 학부 때부터 계속 구석기유적 현장을 찾아 다녔기 때문에 구석기 유적을 찾는 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구석기 유적을 좀 더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꿈을 실현할 기회를 찾아서
하지만 한국문화재단에서는 서울시 유적조사에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있어 상명대 박물관으로 이직을 했는데 이곳에서 서울의 구석기 유적을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물론 학교 박물관장님은 저와 생각이 달랐죠. 사람들은 서울이 이미 다 훼손 되어 유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문화재 조사 수요가 있으면 대부분 학교박물관에 있었던 저에게 의뢰가 왔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아파트 개발을 하거나 3만 평방미터 이상 땅을 개발할 때는 2004년부터 지표조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특별히 서울에는 조사기관이 없었어요. 아침에 출근하면 지표조사 해달라는 요청이 불을 뿜듯 했습니다. 저는 출근해서 팩스 받고 계약하고, 점심에 조사하고, 밤새 보고서를 써서 다음날 조사보고서를 전달했습니다. 아주 신속하게 지표조사를 하면 발굴조사까지 바로 이어졌죠. 그러니 그 당시 지표조사를 하며 유적은 제가 다 조사 할 수 있어, 드디어 꿈을 실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죠.

 드디어 서울에서 구석기 유적을 찾아내다!
‘영동AID차관아파트’라고 들어보셨나요?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차관을 받아 세운 아파트라 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지금은 재개발 되었죠. 그 당시 다른 곳에서 지표조사를 엉망으로 해서 제가 다시 시굴조사를 하게 되었고, 구석기와 신석기유적이 확인되어 서울에서 정식으로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2004년 첫 번째 구석기 유적을 찾은 것이죠. 중기구석기 시대로 20만 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연이어 그곳에서 신석기도 찾게 되는 행운도 누리게 되었죠. 그전에 서울 면목동 구석기 발굴조사가 1967년에 있었지만 정식 발굴조사는 아니었습니다. 

 

서울 삼성동 영동차관아파트 구석기시대 지층, 지질조사

 

광화문 육조거리, 서울시청 군기시터 직접 발굴
2008년, 오세훈 시장이 광화문광장을 개발할 때, 제가 문헌에 있는 ‘육조거리’를 한 번 조사해보자며 권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세종문화회관으로 다 개발되었는데, 무슨 육조거리가 있겠느냐” 했어요. 그때 딱 세 사람이 있을 거라 했습니다. 저와, 동아일보 윤한준 기자, 경기대 안창모 교수였어요. 하지만 한 사람은 기자고, 또 한 사람은 근대 건축하는 분이니, 실제 조사를 해서 증명할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예요. 처음 현장을 답사하고 오후 4시 정도에 광화문광장의 공사를 중지시킨 후, 절차를 밟아 발굴을 하면서 지금의 육조거리가 발견되었죠.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으로 이어지는 곧은 대로로 조선시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조 관아가 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는 토목건축방법이 지금과 다릅니다. 모두 없애고 파괴해도 그 자리에 묻었지, 지금처럼 다 긁어내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흔적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세종로거리로, 1394년에 경복궁을 세우면서 그 앞이 육조거리였고, 그 이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또 서울청사 지하 ‘군기시터’는 지금의 국방과학연구원처럼 옛날에 무기를 만들고 연구했던 곳이죠. 그곳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비밀스런 군사 장소들과 불랑기포 등 당시의 무기들도 발굴했습니다. 실제로 육조거리와 군기시터는 조선왕조실록 문헌에 나온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유적을 찾아내어 문헌과 고고학이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 모두 국가 소유, 인디아나 존스는 영화일 뿐
땅속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법적으로 국가의 소유입니다. 내 땅에서 나와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가 땅에서 금부처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니 신고해야 합니다. 대신 유물을 발견해 신고하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발굴을 시작하면 유물이 많이 나옵니다. 금귀거리, 구슬 같은 목걸이들은 세어보면 500점, 600점, 1000점 될 때가 있어요. 조그마한 것들이 모여 있으니 발굴하는 인부들이 슬쩍 가져갈 수도 있죠. 하지만 이미 사진을 다 찍어 놓아서 가져가면 바로 흔적이 남아요. 그리고 가끔 거울을 가져가거나, 예쁜 구슬, 귀걸이를 가져가면 이런 소문을 내요. “그것 가져가면 눈이 먼다더라”, “귀가 막힌다더라”(아! 그렇군요. 웃음) 사람들에게는 옛것(무덤)에서 나온 물건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거든요. 설사 가져갔다 해도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간혹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 대부분 겁이 나서 선뜻 가져가지 못할 뿐 아니라, 설사 가져갔다 해도 다음 날 바로 가져다 놓죠. 한 번은 산성을 발굴하면서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나왔는데, 보이지 않는 거예요. 주변 학교 학생의 소행인 줄 알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부모님들을 설득했죠. 너무 겁을 주면 버릴 수가 있기에 조심해야 해요. 영영 못 찾을 수도 있거든요.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이것 없으면 역사가 바뀝니다. 그러니 꼭 이야기해 달라” 부탁도 하고요. 그러면 3~4일 안에 가져다 놓기도 합니다.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중 발견된 조선시대 육조거리 시굴현장 자문회의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 복원기술은?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등의 기술이 뛰어난데, 제국주의 시절 이 나라들이 문화재를 자신의 나라로 가져오려면 훼손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보존, 복원기술이 발달한 것이죠. 우리는 IT기술과 컴퓨터그래픽을 주로 이용하는데, 우리 스스로 무너진 미륵사탑이나 건축들을 복원하다 보니 20~30년 동안의 기술이 축적되었어요. 또한 목재, 석재, 종이를 보존, 복원하는 기술들은 물리, 화학, 자연과학 등 인접 학문과 함께해야 하는데, 이러한 인접 학문의 발전으로 세계적인 최고 기술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남아 나라들은 우리와 함께 복원하기를 원합니다. 선진국들은 유물을 가져가서 다시 돌려주지 않는 경우가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고, 남을 침략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 나라 현지에서 직접 복원을 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더 믿는 거죠.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기고 이를 토대로 우리의 기술이 더욱 발전할 거라 예상합니다.

지금도 고고학을 하겠다는 후배들이 있는지?
많이 있어요. 하지만 끝까지 가는 사람이 별로 없죠. 왜냐하면, <인디아나 존스>나 <미이라>같은 영화를 보고 다들 멋진 환상에 젖어서 오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고고학은 전혀 다르거든요. 고고학은 발굴현장이 거의 노동으로 삽 들고, 호미 들고 땅을 파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고고학의 즐거움과 재미를 얻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걸 바쳐야 해요. 심지어는 가정도 버려야 할 정도죠. 현장에 1주일, 한 달, 1~2년 이상을 상주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을 지켜야 해요. 파편 하나 나온 층을 지키기 위해 갑자기 날씨가 바뀌면 밥 먹다가도 뛰어나가 현장을 사수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역사의 완형을 얻고, 역사 하나의 잃어버린 단서를 찾는 즐거움을 얻는 것이죠. 호미로 땅을 파서 토기 조각 하나 나오면 “아~ 재밌네”하는 가벼운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죽어있는 역사에 숨을 불어 넣는 고고학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는 없어요. 과거의 시간, 사건들이 다 의미 있는 역사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가 숨겨져 있는 역사를 끄집어내는 순간, 역사는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하는 고고학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 역사에 신석기, 청동기 시대는 없고 금속병용기, 즉 철기와 석기가 같이 있었던 시대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자신들보다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진 미개한 나라라고 주입시켰죠.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는 ‘도유호 선생’, 남한에는 ‘손보기 교수’가 있었죠. 1962년 북한의 도유호 선생은 북한지역에 구석기 시대가 분명히 있다고 믿고 열심히 찾아 마침내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의 신석기시대 층 아래서 붉은 흙층을 찾고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를 찾았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금속병용에서 구석기 시대로 확 늘린 것이죠. 1년 후 미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던 부부대학원생이 한국에 와 공주석장리에서 구석기 ‘뗀석기’를 발견해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를 찾아갑니다. 이를 계기로 공주석장리를 발굴하면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 되었고, 이후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이 구석기시대로 확대되었죠. 이것이 바로 고고학의 가치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외항선를 타셨어요. 한 번 나가면 6개월, 1년 후에 돌아오셨죠. 저 또한 대학 때부터 발굴현장 조사를 다니며 거의 집에 있지 않아, 어머님께 많이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유적이 더 중요했어요. 나의 개인사를 다 챙겼다면 오늘은 없었을 겁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박준범 고고학자의 얼굴에 소명감이 오롯이 묻어났습니다. 지금은 부인이 외롭지 않도록 같이 갈 수 있는 자리는 기를 쓰고 함께 한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문화유산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공공개발원조)사업을 통해 그동안 익힌 복원, 보존기술로 세계인과 유적, 유물도 연구하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 고고학자 박준범 선생님에게 무한한 마음의 응원을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독자들을 위해 앞으로 그동안에 쌓인 고고학 이야기를 기고해주기로 하셔서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박준범 
·고고학자, 문화유산 전문가, 상명대학교 특임교수
·재단법인 서울문화유산연구원 부원장
·피어리스 아미박물관 학예연구원 역임 
·조선대학교박물관, 상명대학교박물관 문화재

  조사연구 등 학예업무 총괄
·한국문화재재단 등 서울 광화문 육조거리유적, 
  서울시청내 군기시터, 선잠단지 등의 유적조사
·문화유산 국제협력 공공개발원조(ODA)사업
  (콩고국립박물관 건립, 페루 국가문화유산 
  통합시스템 구축 BPR/ISP 사업)
·저서《한반도 신석기시대 지역문화론》(공저),
  《동아시아 마제석기론》(공동번역),
  《가락동2호분》(공저) 등
·연구보고‘기후변화적응을 위한 문화재보호 
  종합대책수립’, ‘서울 성저십리 문화유적 
  보존방안 연구(1)’ 등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4>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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