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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150년 역사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2. 1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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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 사후연구 - 기업 역사]

미쓰비시 150년 역사


  한국인들이 일본 기업 중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미쓰비시’일 겁니다. 한국의 유명 여자연예인이 미쓰비시 계열사의 제품 광고를 거부했다는 것부터 시작해,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군함도’영화를 통해 부각된 강제노역의 전범기업으로 이 회사는 한국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미쓰비시 150년 역사 가운데 우리가 아는 부분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기에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미쓰비시 기업의 150년 역사 전체를 살펴보는 것은 일본기업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입니다.


이와사키 야타로 (출처 : Wikipediadia)


1. 메이지유신과 함께 출발한 미쓰비시(1870~1912)

1.1.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 弥太郎)의 정경유착(政經癒着)적 출발(1870~1885)

  미쓰비시의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신분을 팔아넘긴 하급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나 활동했던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메이지 유신’(1868)이 준비되고 출발되던 격동기였습니다. 그의 고향인 ‘도사번’(土佐藩)은 메이지유신의 중심지가 되었던 일본 서남부에 위치한 도쿠가와 막부에서 소외된 변두리 번중에 하나였으며, 메이지 유신의 산파와도 같았던 ‘사카모토 료마’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야타로는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설립한 사카모토 료마와 친분을 쌓았고, 그도 역시 해운업에 뛰어들어 미쓰비스 그룹의 모태인 ‘미쓰비시 상회’를 설립했습니다(1873). 야타로는 본사를 도쿄로 옮긴 후(1874) 메이지 중앙정부의 대내외 전쟁들에 재정적으로 참여해 정부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대만에서 자국민 선원들이 살해된 사건을 빌미로 단행한 대만 출병(1874)과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으로 일어난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 전쟁(1877)이 그것입니다. 또한 야타로는 메이지 신정부가 신 통화를 공표하고 당시 옛 번들이 발행했던 구 통화나 어음, 채권 등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부 관료의 주선으로 막대한 차익을 얻었습니다. 이런 정경유착(政經癒着)적 배경 속에서 미쓰비시는 보험, 광산, 은행, 부동산 등의 각종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경영인으로서 야타로는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개화청년 양성에 힘썼던 ‘후쿠자와 유치키’(福澤諭吉; 1835~1901)의 영향을 받아서 출신지와 상관없이 서양학문을 배운 학생이나 외국인을 적극 채용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사원들에게 '나라가 있고서 미쓰비시'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에 기업인으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쓰비시가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꾀하던 메이지 유신의 정책과 밀착되어 출발한 부정적인 측면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

일제의 태평양전쟁기에 주로 미쓰비시의 군수공장 등에 동원된 10대 초중반의 여성 근로정신대, 美 국립문서기록청 제공


1.2. 메이지 신정부와 함께 성장한 미쓰비시(1886~1912)

  야타로가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미쓰비시와 메이지 정부와의 밀월관계는 한층 더 깊어져 갑니다. 미쓰비시는 후쿠자와 유치키의 주선으로 다카시마 탄광을 인수받았고, 메이지 정부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나가사키 조선소도 인수받습니다(1887). 당시 메이지정부는 근대화에 필요한 사업을 정부주도 하에 기반을 닦은 후에 민간기업에 넘겨주는 방식을 취했는데, 그 결과 기업은 자연스럽게 정부와 결속되고 그 통제 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쓰비시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조선과 청나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재빠르게 발맞춰 군함을 제조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사업을 수행하여, 정부의 비호 아래 해운사업을 독점해 갑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운동(1894)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보내어 조선에 들어와 양민들을 학살하고 청일전쟁을 벌여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 정부의 야만적이고 탐욕적 정책에 동조합니다.

  이렇게 메이지 정부의 그늘아래서 미쓰비시는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건전하고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어 가는 능력은 정반대로 상실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러일전쟁(1904)의 승리와 함께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른 일본정부의 본격적인 제국주의 침략과 맞물려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2. 일본 제국주의 역사와 함께 흥망한 미쓰비시(1916~1945)

2.1. 4대회장,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 서구식 경영의 도입과 중공업 발전 

  메이지 정부의 비호와 함께 미쓰비시의 2대 회장인 야노스케(야타로의 동생)의 장남이었던 이와사키 고야타가 4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미쓰비시는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사업부의 분리 독립을 단행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공업’(重工業)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철강, 비철금속가공, 화학공업, 기계제조 등의 대규모 설비를 이용한 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공업의 발전은 본격화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맞아떨어져 일본군의 항공모함과 제로센으로 잘 알려진 전투기 등의 전쟁 무기를 만드는 군수산업의 발전을 통해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가는데 일조하면서, 군함도로 대표되는 강제노역 등의 비윤리적 기업운영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전범기업이라는 오명을 얻습니다. 처음부터 정경유착의 고리를 스스로 끊지 못한 참혹한 대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일본패망 후 현재까지의 미쓰비시(1945~1953)

3.1. 미군정에 의한 해체, 그러나 극적인 부활; 한국전쟁 발발!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유엔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의 재벌해체 조치로 미쓰비시는 120개의 작은 회사로 분리되어 상표조차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1949년 공산권 중국의 탄생(1949)과 더불어 발발한 한국전쟁(1950)의 상황 속에서 미국에는 맥카시즘(McCarthyism) 광풍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미국은 일본을 통해서 아시아에서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로 작정했고,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 발효를 기점으로 구 재벌계 기업의 재통합 작업이 시작됩니다. 미쓰비시는 한국전쟁을 위한 일본에서의 전쟁물자의 생산과 보급이라는 소위 ‘조선특수(朝鮮特需)’를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남겼으며, 미국의 정책변화에 의해 합병과 그룹 통합을 통해 거대 그룹으로 다시 출범합니다. 미쓰비시의 입장에서는 기사회생의 순간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일 것입니다.


미쯔비시 조선소 모습

일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인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조선소.

과거 80여척의 군함이 건조된 이 조선소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대거 동원되어 혹사당했지만,

조선소 자료관은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2015년 6월 30일 한국일보 제공)


3.2. 경제대국 일본과 미쓰비시(1954~현재)

  미쓰비시는 최대 장점인 중화학 관련 계열사를 앞세워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 우선정책에 부응하며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여기에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했던 미쓰비시는 다시 한 번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1960~1970년대 한국경제발전에 참여해 많은 수익을 올립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 경인선 전철화, 동양최대 규모의 쌍용시멘트 공장, 수출공업단지, 포항종합제철소, 서울지하철, 대한조선공사 확장, 신진자동차 기술 제공, 엘리베이터 제조 기술 제공 등이 그것입니다.

  이후로 미쓰비시는 항공·우주·기계공업 사업을 꾸준히 확장해 이지스함, 잠수함 등의 함정 제조 분야와 위성 발사 로켓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아베정부의 우경화 정책에 발 맞춰 군수산업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아베 정부는 2014년 4월 ‘무기 수출 3원칙(공산권, 유엔 결의 등에서 무기 수출을 금지한 국가, 국제분쟁의 당사국 또는 그 우려가 있는 국가에 무기 수출을 금하는 일본의 법령)’을 폐지했는데, 일본 군수업체 1위인 미쓰비시에게는 호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미쓰비시 태동기에 메이지정부와의 밀착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불안함은 지나친 염려일까요?


  글을 정리하자면, 메이지 유신과 함께 시작된 150년 역사의 미쓰비시는 일본의 근대역사를 관통하며 역사의 수많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기업이 미쓰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쓰비시는 일본 근대화 뿐 아니라 경제대국 일본의 명성을 세계에 떨치고 한국 경제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 이후로 계속 이어져온 정경유착의 고리를 역사적으로 단절하고 현재적으로 끊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국가의 명령과 자사의 이익을 따라 정당하지 않은 전쟁에 참여하는 오류를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건전하고 존경받는 기업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DYL (Design Your Life)대표 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8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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