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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줄리

2018년 3월호(제 10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3. 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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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ive & Prospective 10. -‘Me too’]

 내 친구 줄리  


 요즘 SNS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회 여러 분야의 ‘Me too’운동이 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10년 이상 해온 여자라면 크고 작은 성적 농담과 성희롱 경험은 한두 번 쯤은 있을 것입니다. 나 또한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 하지만 언어적으로 부적절한 농담을 일삼는 남자들을 숱하게 보아왔지요. 그럴 때 나는 기질상 기분 나쁨을 상대방이 알도록 표정으로 드러내거나 향후 인간관계에서 조용히 Reset하는 소심한 복수를 택해온 것 같습니다. 과거엔 여성은 약자이고 사회생활에서 소수이다 보니 남자들의 무감각한 행동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어지간한 고시의 수석은 모두 여자이고 고등학교마다 전교 1등은 여학생들입니다. 회사마다 수석을 비롯한 합격생들이 거의 여자들이다보니, 남자지원자들에게 오히려 가산점을 준 것이 후에 발각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여자들은 부당한 것에는 당연히 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고 지금처럼 실력과 능력을 갈고 닦아 감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처우를 당하지 않도록 무장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개인적인 자기개발과 동시에 주변에 보고 배울 만한 선배나 친구가 있다면 긴 사회생활을 더욱 발전의 여정으로 만들기가 훨씬 수월할지도 모릅니다. 제 경우는 운 좋게도 첫 번째 해외출장에서 나를 자극할 만한 멋진 여성을 만났습니다. ‘좋고 적극적 의미의 Me too’의 귀감인 셈이지요. 



그녀의 이름은 줄리. 

  20대 후반이었던 저는 첫 해외출장으로 캐나다 몬트리올의 아트마켓에 가게 되었습니다. 첫 출장이라 긴장도 되었고 업무시간 외 나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처음 가보는 몬트리올과 인근지역의 지도를 매일 보며 가슴 설레었습니다.

  아트마켓에는 수많은 공연이 펼쳐지고, 세계 각지에서 온 공연 관계자들은 그 공연들을 보면서 자기나라로 초청도 하고 투어공연도 계약하는 그런 일들을 합니다. 저는 하루에 5~6편의 크고 작은 공연들을 보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를 근거지로 하는 유명한 서커스 제작회사 중 ‘서크 엘로와즈’(cirque Eloize)라는 단체의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갔는데, 그 단체를 홍보하는 앳된 외모의 신입사원을 만났지요. 함께 극장에서 공연을 보다가 나이가 비슷한 것을 알게 되었고, 공연 후 파티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즉각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트마켓이 폐막할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공연을 함께 보며 몬트리올 카페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한 눈에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몰입하는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8년 후, 줄리는 자신의 회사에 제작비를 투자하며 임원의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녀는 멋진 공연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들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가능성 있는 공연에 투자하기도 하는 등 여전히 그 분야의 독보적인 제작자가 되어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1인극 서커스를 만드는 천재적인 아티스트 ‘다니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스위스 아버지와 이태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사진가 집안으로 암실은 그의 놀이터이자 연구대상이었고, ‘페라’라는 광대를 만나서는 곧 서커스에 빠져들었지요. 다니엘은 스위스를 기반으로 ‘떼아트로 서닐’(Teatro Sunil)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19세에 인도를 다녀와서‘이카로스’(Icaros)라는 서커스 1인극을 만들어서, 20대에 세계를 돌며 20개국에서 7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습니다. 6개 국어를 하는 젊은 유목민 다니엘은 멕시코 공연의 성공으로 멀리 몬트리올 서크 엘로와즈(Cirque Eloize)의 초청까지 받은 겁니다.

  몬트리올에서 줄리는 다니엘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다니엘의 창의력과 비전에 몰입되었고, 이어서 서크 엘로와즈(Cirque Eloize)와 작품을 만들자고 강력하게 요청했지요. 줄리와 다니엘, 스위스 떼아트로 서닐(Teatro Sunil)과 캐나다 서크 엘로와즈(Cirque Eloize)의 만남은 다니엘의 자전적 노스텔지어 3부작 ‘노마드’, ‘레인’ 그리고 ‘네비아’라는 작품을 탄생시켰고 이 세 작품은 이후 모두 서울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잘 알려진 ‘태양의 서커스’가 헐리우드 무비라면, 다니엘의 작품은 칸느 수상을 받을 정도라는 겁니다. 다니엘은 어느덧 세계적인 연출가가 되어 태양의 서커스의 작품도 연출하게 되었고, 계속 놀라운 신작을 만들면서 줄리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곧 둘만의 제작사를 만들어 작품을 제작하자는 약속도 했습니다.


<서크 엘로와즈의 '레인(RAIN)'>


  그 후 다니엘이 ‘토리노 동계올림픽’, ‘소치 동계올림픽’, ‘패럴림픽’ 폐막식 연출, 마린스키 오페라 아이다 연출, 단편영화 제작을 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계속 전해졌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돌연사하지 않았다면, 2009년 월드투어 연출도 관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여정에 물론 줄리도 함께였습니다.

  2011년 결혼을 하고 차기작으로는 달리의 미술세계를 서커스로 만들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작년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던 <라 베리타>입니다. 이 서울 공연에 줄리는 오지 못했습니다. 평소 심장이 안 좋았던 줄리는 2016년 영화처럼 홀연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거지요. 늘 줄리와 함께였던 다니엘이 줄리없이 혼자 서울 공연에 온 것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늘 열정적이고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줄리... 창의적인 천재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와의 사랑 앞에 용감했던 내 친구 줄리... 비록 그녀는 없지만, 그녀가 남긴 멋진 공연들은 아직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 공연이 되고 있고, 그의 사랑하는 남편의 멋진 공연도 계속될 겁니다.

  저는 이제 한 달 뒤 복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치 신입사원처럼 조금은 긴장이 됩니다. 아주 오래전 떨리지만 잘 하고 싶다는 초심을 떠올려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러다가 앨범에서 발견한 줄리의 사진... 성희롱, 성차별 이런 단어들에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좋고 적극적 의미의 Me too’의미로 승화시켜서 오늘은 줄리를 떠올리며 사용하고 싶습니다. 20년 전 몬트리올에서 처음 만난 열정적이고 패기 넘쳤던 줄리처럼 다시 저도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Me too...


예술의전당 창의문화팀장 손미정

mirha@sac.or.kr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1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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