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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헌법을 왜 ‘평화헌법’이라고 부를까요?

2018년 5월호(제10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5. 3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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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를 통한 일본 사후 여행을 위한 연구]


일본 헌법을 왜 ‘평화헌법’이라고 부를까요?



 지난 해 봄, 일본여행을 다녀온 후에 지금까지 일본에 대한 사후 여행으로서의 ‘연구여행’을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다룬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국가신도는 일본의 과거에 대한 것인데, 이번에 다룰 셋째 주제는 일본의 현재와 미래, 즉 일본헌법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 일본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근간인 일본헌법은 매우 독특하게도 보통 평화헌법(1946.11.3.공포)으로도 불려집니다. 왜 이런 별명을 가졌을까요? 구 헌법인 메이지헌법과 어떻게 다른가요? ‘평화’가 정말 중요한 개념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화를 이루겠다는 건가요? 메이지유신 이후 2차대전의 패배(1868~1945)까지 77년 동안이나 일본 전체를 움직여왔던 종교와 정치와 군대가 일체화된 군국주의적 경향이 이 헌법 하나, 그 중에서도 한 조항(제9조)만 가지고 억제될 수 있을까요? 특히 이 마지막 질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일본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은 36년 동안 무려 140만명(징병 100만, 징용 40만) 정도의 조선청년들이 헛된 생애를 바쳤고, 위안부 즉 성노예로 끌려간 여자들의 숫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많은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가라타니 고진([헌법의 무의식] 2017)과 같은 분은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는 나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패막 같은 것이 평화헌법, 특히 제9조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과연 일본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행동할까요? 제가 태어난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등이 일본의 끔직한 지배를 받아보았고, 그들 때문에 2천만 명의 피를 흘렸던 아시아인들의 경험과 감정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외부의 시각이 아니라 일본 자체의 관점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이 펼치는 논리를 차근차근히 따라가면서도 동아시아의 미래를 정직하고 밝게 재조명해 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정적 경험에 의해 골이 깊어져 감정에 좌우되는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 태도는 일본과는 지정학적으로 정반대 방향인 ‘중국’을 향해서도 돌려야 합니다. 최근 중국은 서양적 기원을 가진 공산주의와 고대 동양적 뿌리를 가진 황제정권이 합쳐지는 괴상망칙한 길로 들어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작은 한반도의 양쪽에 포진한 중국, 일본과 미국, 러시아, 그리고 뜨거운 핫 감자인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신 바짝 차리고 대처하지 않으면, 100년 전에 한반도가 경험한 끔찍한 운명이 반복될 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1945년 이후로 일본이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이 있고 역사적으로 많은 관계를 맺어서 대체로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일본을 몰라도 된다’ 혹은 ‘모른척 하고 산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이렇게 살다가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비참하게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을 겪고, 또 36년의 치욕의 식민지생활을 한 것임을 생각하면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남이 도무지 넘볼 수 없는 실력을 제대로 갖춘다면 그들을 무시할 것도 또 무턱대고 무서워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되어가는 동아시아 시대와 우주시대를 여는 첨병의 역할을 할 파트너가 되자고 먼저 권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전후 연합국총사령부(GHQ)의 맥아더 사령관에 의해서 제시되어 일본인들이 의논한 가운데 자신들의 국회를 통해서 수납하여 만든 평화헌법에 돌아가 봅시다. 이 중에서 우리의 핵심 주제(일본은 과연 침략행위를 재개할 것인가?)와 관련된 세 가지 내용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본의 평화헌법이라고 불리우는 근거가 되는 제9조(‘전쟁포기, 전력-교전권 부인’)입니다. 둘째, 일본의 전통과도 또 평화헌법과도 연관된, 일본헌법의 가장 앞에 나오는 제1조(‘(상징)천황제’)입니다. 셋째, 우리가 앞에서 다룬 내용으로 천황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본의 전통종교인 국가신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 내용들을 다섯 질문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최초의 헌법인 메이지헌법은 천황제와 전쟁을 어떻게 다루는지, 2) 맥아더 통치기에 평화헌법의 1조(천황제)와 9조(전쟁포기)가 어떤 상관관계에 있었는지, 3) 21세기를 사는 일본인들은 이 두 가지를 어떤 관계로 보는지, 4) 천황제와 국가신도는 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 5) 마지막으로 일본은 과연 침략행위를 재개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1. 메이지 헌법에서의 천황제와 전쟁에 대한 규정

 일본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본받으면서 근대를 열었던 메지지유신(1868) 때에 가장 고심했던 문제가 일본의 헌법을 어떻게 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해를 유럽에 가서 유학하며 고민한 사람이 한국에는 악역을 했던 인물이지만, 일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서남쪽 번들의 하급사무라이 출신으로서 메이지유신의 정권쟁탈자들의 실질적인 관심은 일본의 내적 본질은 변함이 없으면서 외적으로는 일본이 서양문화를 재빠르게 흡수한 탁월한 국가라는 것을 서양인들에게 단지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일본 안에서 자신들이 영구히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구조적으로는 내각책임제의 형태를 띤 천황제의 구조를 만들어서 국무위원들이 천황을 보좌하는 체제를 구성하긴 했습니다(‘구헌법 55조’). 그렇지만 여기에 총리대신에 대한 규정이 없는데, 이는 국무위원의 한 사람일 뿐이므로 크게 실력을 가질 수도 책임을 질 수도 없었습니다. 대신에 추밀원고문이 천황을 보필하도록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일본의 정국을 좌우했던 원로입니다(‘구헌법 56조’). 어느 곳에서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들 원로들이 어떻게 선정되며 그들의 지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기 때문에, 구헌법은 사실상 뒤에서 숨어서 모든 것을 조정하려는 이들 원로들의 통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절름발이처럼 된 헌법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군대의 통솔’입니다. 우선 천황이 육해군의 통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지만 사실상 원로가 통솔하는 것이지요(‘구헌법 11조’). 여기서 육군과 해군은 각각 천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상호 독립되었고, 이것이 2차대전 당시에 상호협조가 미국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상호경쟁과 불신을 일으켜 전쟁능력을 크게 감소시킨 원인이 될 정도가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원인인 내각이나 그 내각을 구성하는 의회의 자립은 불가능한 구조를 구헌법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던 원로들이 살아있는 기간에는 천황주권설이 구헌법의 해석에 핵심이었습니다. 즉 천황이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다는 이론인데 실질적으로는 천황 뒤에서 원로들이 장악하는 구조지요. 그렇지만 이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미약한 다이쇼 시대(1912-1925) 이후에 군대의 통솔을 누가 할 것인가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미노베 다카스키’를 중심으로 천황기관설이 등장하여 헌법해석의 중심을 이룹니다. 즉 천황은 하나의 정치적 기관에 불과하며 명목상의 주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인데, 전후에 현재의 (상징)천황제로 부활합니다. 그렇지만 대공황 이후(1929) 일본이 외부로 강력하게 팽창해 나가면서, 일본군부는 자신의 독단을 제어할 어떤 기구가 없는 가운데 만주사변(1931)을 일으킵니다. 이를 즈음해서 ‘천황기관설’이 후퇴하고 ‘천황주권설’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2차대전 끝까지 일본을 몰고 갑니다. 전자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테러의 위협을 받거나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대신에 테러를 자행하던 이들 군부는 육해군을 억누르는 원로가 없는 가운데, 심지어 의회도 천황도 모르는 사이에 독단적으로 새로운 전장을 전 아시아에 열어가면서 국가를 위기로 몰고 간 겁니다. 이런 속에 결국 점차로 군부가 정계를 장악하면서 아무도 제어할 장치가 없는 가운데 일본은 걷잡을 수 없이 2차 대전의 수렁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2. 평화헌법이 제정될 당시의 두 조항의 상관관계

 일본 헌법에 대하여 점령군 총사령관인 맥아더가 가진 초미의 관심은 천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습니다. 만약에 천황제를 강제로 폐지하게 한다면, 일본이 2차 대전 동안 내내 으르렁거리며 외치던 ‘일억(명) 총옥쇄’, 즉 일본인의 전멸을 각오하고 미국에 저항할 것이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미군은 최소 백만 명을 동원해야 하며, 그 군대도 무기한으로 주둔해야 할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야마무로 신이치, [헌법 9조의 사상수맥] 2010) 그래서 맥아더가 일본의 전후 정치인들에게 내건 확고한 기본 조건은 천황을 전범으로 소추하지 않되 대신에 전쟁포기 규정을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헌법을 ‘일본국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사’를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포츠담선언 제12항’을 따르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지장이 없는 한 피점령국의 기본 법제를 존중할 것을 규정한 헤이그의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규칙 제43조’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상징적 존재로서의 천황제(1조)라도 인정받고 싶으려면 전쟁포기(제9조)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 즉 천황제와 전쟁포기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제9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1항 : “전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행사를 타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도구로 삼는 것을 영구히 폐지(永久にこれを放棄する abolish)한다”
 제2항 : “앞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 해, 공군 기타 전략의 보유 및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들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포기를 선언하는 평화헌법이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이 과정에 미군과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 주고받았던 대화와 조율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결국 중요했던 것은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맥아더와 미국정부의 의지였던 겁니다. 

3. 21세기 현재 두 조항의 상관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일단 맥아더는 이렇게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평화헌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현실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문제가 새롭게 발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이런 조항을 헌법에 고정시켰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 법조항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헌법을 만들 때에 어떤 원리로 했느냐고 물어볼 사람이 없어지고 단지 문서와 글자만 남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일본뿐 아니라 일본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유동적이라는 문제는 늘 중요합니다. 두 가지 역사에서 일본은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첫째, 2차대전 이후 아주 빠르게 발생한 국제정세가 바로 미소간의 냉전이며, 그 결과로 일본 바로 옆에 있는 중국에서 일어난 중국내전(1945~1949)과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동란입니다. 이때 미국은 2차대전의 고통에 대한 ‘과거’의 기억보다는 ‘현재’의 냉전에 대처할 필요성 때문에 일본을 자기편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여야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동란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인 1950년 1월 1일 년 연초, 성명서에서 맥아더는 ‘일본의 신헌법은 자위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이에 발맞춰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무력에 의하지 않는 자위권은 존재한다’고 표명했지요. 그래서 6.25의 전쟁이 한국에서 발발한 직후인 그해 8월,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어 실질적인 재군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출병까지 요구하자 요시다 수상은 그것은 거절했습니다. 이어서 1953년 3월에 ‘미일상호방위원조협정’에서는 일본이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는 대신 일본의 방위력을 점증시킬 것을 결정했습니다. 7월에는 보안청이 방위청으로 격상되어 육, 해, 공군으로 구성된 자위대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9조를 그대로 두고 그것을 우회하여 해석하는 일본적 전통이 만들어진 겁니다.     
 둘째, 이어서 국제관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일본의 위상을 재고하여 평화유지군 파병을 요구받자 그대로 시행한 겁니다. 그래서 이라크 전쟁에 비전투요원으로 자위대를 파송하였는데, 귀국 후 이들 중에서 54명이나 자살하는, 일본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차대전을 직접 일으키지 않은 이 젊은이들이 섬기려고 갔던 먼 이국땅에서 경험한 놀랄만한 사실은 일본(군)에 대한 철저한 그들의 배타적 태도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들은 세계인 속에서의 일본인으로서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근본적인 회의를 하였고 그것이 집단적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대로 이들은 해외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고, 싸워서도 안 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위 이중구속의 상태에 빠진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시도한 것은 헌법조항은 그대로 두고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는 소위 해석개헌이라는, 획기적(?), 그러나 너무나 일본적 방식일 수밖에 없는 것 입니다. 이런 꼼수를 부리는 늙다리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런 이중적 잣대에 자신을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순진하지만 훨씬 정직한 청년 자위대원이었기에 외국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경멸에 찬 시선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현재에도 일본정치 현실에서 헌법 제9조는 늘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보수파인 자민당은 공공연히 제9조의 개정을 주장하지만, 평화주의자와 평화헌법을 옹호하는 정당들은 그것이 불가하다고 외치며 서로 대결구도를 이룹니다. 그러나 막상 선거철이 다가오면 아무리 보수파라도 제9조의 개정을 쟁점으로 삼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인들 속에 뿌리 깊게 ‘전쟁은 안 된다, 더더구나 본격적 무장은 안 된다’는 생각이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깔려있기 때문에, 보수파도 그 쟁점으로는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 보수파들은 안보법률과 같은 것을 만들거나 긴급사태조항을 헌법에 추가하는 형태로 제9조를 무기력하게 사문화시키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조 아베 현 일본수상은 2020년까지 제9조의 개정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런 자살한 자위대원들과 함께 일반 일본인들이 가진 관점은 바로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이 동아시아 혹은 세계재패라는 헛된 목표를 추구했던 것에 대한 무의식의 죄악감 혹은 총체적 회한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상하게도 ‘논리적 뒤틀기’를 감행합니다. 그는 프로이트와 칸트를 들고 나오면서 일본이 먼저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두지 않는 행위는 국제사회를 향하여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는 (순수)증여, 일종의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이런 아리송한 자기의 논지를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보편종교를 창시한 예수의 말을 들고 나옵니다.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라고 말한 구약성경과는 달리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대라”라는 잘 알려진 말입니다. 국제사회를 향해서 이 말과 같은 효과를 가지는 것이 바로 일본헌법 제9조라는 겁니다. 일본헌법의 힘은 ‘너희가 우리를 때려도 우리는 때리지 않고 다른 쪽 뺨을 때리도록 돌려대겠다’는 태도로 국제사회를 향해서 이렇게 순수증여를 시행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는 유엔의 근본적인 개혁은 일국(즉 일본)의 혁명에서 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평화를 향한)세계동시혁명의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헌법 제9조의 실행을 유엔에서 선언하는 것만으로 상황은 결정적으로 바뀝니다. 그것에 동의하는 나라들이 나올 것이고, 그와 같은 나라들의 연합이 확대될 것이며, 그것은 구연합군의 상임이사국으로 유엔을 지배해온 체제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라타니 고진의 생각은 너무 순진할 뿐 아니라 세 가지 치명적 한계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보편종교를 창시한 예수의 말은 인간 속의 가장 심원한 요소인 종교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어떤 물리적 박해나 십자가의 죽임을 당함에도 결코 정복당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종교적 확신이 그 뿌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 11명이 자기를 모른척하며 부인하는 것을 묵묵하게 견디면서 오히려 그들이 회개한 이후를 기대하였습니다. 또 1명의 제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것도 허용하고 죽음의 길로 가며 그런 제자의 배신이 오히려 복음을 완성한다는 역설을 이룬 겁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확신한 가운데 회개하여 전혀 새롭게 된 제자들은 순교로 위협하는 로마를 군대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기고 말았습니다. 과연 일본인들은 이런 보편종교적 근거와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희생을 할 수 있는 민족일까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헌법을 보편종교와 비교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비유로 삼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 철저하게 구분된 섬나라였으며 누구의 지배도 받아보지 않은 일본인들의 본성과 심성 속에 이렇게까지 세계를 섬기는 열망이 발현될 수 있으며 발현된 적이 있었던가 하는 겁니다. 철저히 세속적인 일본인의 본성은 사실상 보편종교조차도 물질적으로 세속적으로 피상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세계를 섬기는 차원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정말 무리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호에 다룰 ‘일본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주제와 연관되므로 그 때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전후에 일본인들은 일억(명) 총참회라는 멋진 용어를 만들어 가면서 2차대전을,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과거를 깔끔하게 씻어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미나미 히로시 [일본적 자아] 2015). 사실상 현대일본사회의 모든 누수현상에서 늘 그러하듯이 누구 하나 제대로 참회하거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실상 일억총 무(無)참회에 이를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위선에 빠진 것을 온 세상이 알게 되었는데 일본인들만 모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셋째,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무사가 칼을 놓게 만들면서 이룬 평화의 역사로 매우 진기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짧고 거의 일회성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일본인의 무의식에까지 철저하게 내려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과연 지금 일반적 일본인들이 도쿠가와 시대의 평화를 정말 그리워하며, 그 시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물결을 강력히 일으키고 있기나 한가요?
 그러나 평화헌법과 관련되는, 도쿠가와 시대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일본인의 의식 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구히 그럴 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황제 자체(정치)가 국가신도(종교)와 직접 연관되어서 조작되었던 매우 오랜 역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왕이 바로 거의 최고의 신으로 숭상되는 현상은 어떤 민족과 역사에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의 고대인 조몬시대나 야요이시대에서 현대까지 2천여 년의 긴 역사 속에서 도쿠가와 시대는 매우 짧은 시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통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야요이시대를 지나 통일 일본의 모습을 갖춘 야마토 정권 이후에 바로 이 가장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즉 일본인의 무의식 가운데 들어 앉아있고, 일본의 유일한 정복자이며 통치자였던 맥아더조차도 건드리지 않은, ‘천황제’에 ‘국가신도’ 종교적 기원을 첨가시킨 7세기 후반의 천무(天武)천황의 조처입니다. 천무(天武)천황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라는, 모든 일본인의 무의식에까지 내려가서 거의 일본인의 신화적 경전처럼 되어버린 두 책을 제작하도록 하였지요. 이 두 책과 그가 시행한 정책들의 근본목적은 이전에 다룬 바와 같이, 외적으로는 ‘종교의 정치지배’를 말하지만 사실은 ‘정치의 종교지배’를 이루는 겁니다. 서구에서 왕권신수설과 같이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는 구조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서, 정치 자체가 아예 종교가 되어버리고 모든 다른 (보편)종교라고 할지라도 그 아래에 두어버리는 절대종교적 이데올로기인 겁니다.   




4. 천황제와 국가신도의 결코 뗄 수 없는 상관관계  

 다시 말하면 일본의 헌법에 관건이 되는 것은 단지 ‘전쟁포기’(제9조)와 ‘천황제’(제1조)만은 아닌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천황제’(정치)에는 반드시 ‘국가신도’(종교)가 따라오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언제 어떻게 현실적으로 다시 합쳐져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도쿠가와 시대나 그 이전의 시대처럼 천황을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그 뒤에서 실질적으로 통치하려는, 일본인들의 전통을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메이지유신기에 정권을 장악한 하급사무라이들은 전혀 새로운 종교로서 국가신도를 창조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고사기], [일본서기], [신황정통기] 등의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려는, 오랫동안 만들어져온 이데올로기들을 적극 활용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황제가 존재하는 한, 일본의 천황은 결코 영국의 국왕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영국의 국왕은 [대헌장](1215)을 시작으로 해서 정치적 권리를 하나씩 내려놓았고, 영국은 이윽고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명예혁명](1688)의 원리를 오래전에 확고하게 세웠습니다. 물론 헨리 8세 때에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정치사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천황제 자체가 일본적 종교인 신도와 철저하게 연관되었다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본인들이 정치적 지도자인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전통을 가진 일본의 천황을, 결코 신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서히 왕으로서의 통치 기능 자체까지 포기해온 영국의 국왕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국가신도는 갑자기 튀어나온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불교와 관계를 가지면서 신도의 종교적 자의식을 성장시켜왔고, 점차로 불교에서 분리해 나오다가 나중에는 불교를 아예 열등한 위치에 놓아버리는 ‘반본지수적설’까지 조작해 내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어서 ‘이세신도’, ‘요시다신도’,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국학’과 같은,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일본유일성이라는 기초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메이지유신이 시작되자마자 발동이 걸린 국가종교로서의 국가신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신도는 지난 1400여 년 동안 일본인들의 무의식중의 무의식으로 자리 잡아 왔다고 볼 수 있으며, 다만 그때그때 정권을 장악한 사람들의 정책의 여부에 따라서 다르게 표출될 뿐이었습니다. 맥아더가 아무리 국가신도를 공적으로 폐지시켰어도, 일본인들은 정치와 종교의 일체화라는 구석기시대적인 일본적 정신을 결코 버리지 않고 있으며, 지금까지 일본의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참배하는 일본군국주의 성지가 바로 1853년 이후 전몰장병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보수적 일본인들을 겨냥한 이런 정치적 잇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정치가들의 행보는 일본인들이 정치-종교-군사의 일치에 대한 불변의 무의식을 가진 것을 반영한다는 걱정어린 외부 시각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즉 1) 종교로서의 ‘국가신도’, 2) 정치체제로서의 ‘천황제' 3) '군대의 실질적 무장’이라는 세 가지 항목을 제대로 분화시키지 않고 하나로 간직하고 있는 케케묵은 일본인들의 무의식이 언제 어떤 식으로든지 외형화 되어 일본의 화산처럼 밖으로 터져 나올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비단 일본과 지척지간에 살고 있는 우리만이 느끼는 주관적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인 누구나 동의하는 객관적 지표가 아닐까요? 
  
5. 일본은 또 다시 침략행위를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세계 어느 국가도 가지지 않는 전쟁포기 헌법 조항(제9조)을 가진 일본이 언제까지 그렇게 갈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일본은 과연 전쟁가능 국가가 될 뿐 아니라 더 나가서 다시 전쟁의 광풍을 몰아치게 될까요? 가라타니 고진은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총체적 회한과 평화에 대한 갈구가 이미 무의식화 되었기 때문에 이 헌법조항을 지켜갈 것이라고 낙관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현재의 (상징)천황제가 보호될 것이라고까지 봅니다. 그의 이론이 가진 치명적 약점은 천황제와 국가신도는 얼마나 끊을 수 없는 관계인지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일본인이니까 오히려 일본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등잔 밑이 어두운 현상에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일본헌법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가상적 시나리오를 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맥아더는 전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상징)천황제를 살려두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천황제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맥아더는 보았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평화헌법의 체제는 아무리 일본인의 ‘내적 자발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일본을 점령한 미국 정부와 총사령관 맥아더와 그 민정장관인 휘트니의‘외적 의지’가 가장 중요한 점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둘째, 그런데 그렇게 살려진 (상징)천황제는 미군이 그 땅에서 떠나고 일본인만의 정치를 해 나가고 있는 지금, 다른 여태의 국왕을 가진 나라처럼 단순히 존경받는 국왕 정도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드시 국가신도와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국가신도와 연관된 천황제는 외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서 이전처럼 상징천황제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천황주권설’을 등에 업게 되고 이어서 전쟁포기의 평화헌법 자체를 사문화 내지는 폐기하는 차원으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은 비록 잠재되어 있어도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이어 메이지유신 이후에 터졌던 피의 광풍을 아시아를 향해서 몰아치는 다시 말해 재발할 가능성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태가 발전하는 것을 주위의 강력한 나라들(미, 러, 중)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통일될 한국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거 조선인보다 작은 평균키를 가진 일본인이었지만, 메이지유신기에 매우 강력한 응집력을 단기간에 발휘하여 77년 동안 2천 만 명의 아시아인의 피를 흘리게 만들며 온 아시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또 1945년 이후에는 군대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아시아에서는 최고이며 세계에서도 최상위급의 문화와 문명을 단시간에 성취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또 일본 속에 정직하고 양심적인 학자나 활동가와 같은 개개인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인간 개인의 권리와 주체성에 대한 관념이 아주 늦게 발달하는 일본역사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그런 개개인이 아니라 전 일본을 급하게 몰아치는 광풍이 일어나면 그만 그 대세를 따라가고 마는 보편적 일본인의 성향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다음호에는 ‘일본인은 과연 누구인가’, ‘일본인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3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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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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