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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누구인가? 2

2018년 7월호(제10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7. 2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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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사후여행으로서의 연구여행]


일본인은 누구인가? 2



 어떤 나라나 그 문화에 대해 공부할 때에 가장 어려운 것이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이라면 이웃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정말 달라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이웃 나라에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사느냐에 정당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매우 고통스러운 역사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일본에게 그런 지독한 큰 고통을 적어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래서 일본님(?)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가장 어렵고 복잡한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해 네 가지 관점을 나누어 보면 1) 일본인의 육체 자체, 2) 일본인이 사는 삶의 조건(자연, 지리, 지형, 기후 등), 3) 내적, 외적 역사 형성, 4) 시간과 역사의 통합적 차원입니다.  
이 중에서 지난호에는 1) 일본인의 육체 자체, 2) 일본인이 사는 삶의 조건 중에서 험준하고 변화 많은 지리와 관련해서 어떤 일본인 상(象)을 만들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이어가면서 계속된 이야기인 지리적 여건 -> 사회적 제도형성 -> 일본인의 본성변화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리적 다양성과 일본통일의 어려움

1) 지리적 다양성 - 통일의 어려움 :
 일본이 제대로 통일된 것은 서양문명의 전신, 전화 등의 통신과 철도, 증기선과 강화된 무력을 통해서 가능한 메이지유신 이후였습니다. 즉 메이지유신의 정권은 사실상 통합된 일본을 제대로 경영한 첫째 역사인 셈입니다. 그 이전에 세 막부들에 의한 통일들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워낙 지리적 다양성과 단절된 지역들이 많기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봉건적 의미의 통일을 이룬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히데요시 치하의 일본의 통일은 분권화된 동시에 통일된 것에 불과한, 매우 특이한 일본적 현상이었습니다(존 W. 홀). 이런 현상은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더 발전되었는데, 그 정체 이름인 ‘바쿠한’체제(幕藩體制)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막’(幕)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전체가 ‘통일된’것을 나타내며, ‘번’(藩, 19세기 전까지는‘령’領)은 그 아래서 각 봉건지역을 ‘분권화되어’통치하는 250여 ‘다이묘’를 가리킵니다. 중앙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고 통치한 것이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 국방 등은 막부가 주관하나 지역의 거의 모든 것은 다이묘가 결정하도록 내버려둔 봉건제도적으로 운영된 겁니다. 그 번 중에서 충성된 ‘후다이’(譜代)다이묘는 주로 일본의 중앙과 동쪽과 북쪽에서 에도(도쿄) 주위를 두르면서 막부를 견고하게 떠받치도록 배치했으나, 충성이 의심되는 ‘도자마’(外樣)다이묘는 서남쪽에 치우쳐 놓여졌습니다. 쇼군은 사실상 오사카 서쪽 지방을 통솔할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을 정도인데, 나중에 이렇게 못난이 취급을 받아 오랫동안 소외된 이 서남쪽 번들이 메이지유신이라는 정치혁명을 일으켜 전 일본 패권의 바톤을 주고 받는 역사적 순환을 이룬 겁니다. 

2) 사회제도/구조의 발전 : 
 세 막부 가운데 가장 발전된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두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하나는 21개 조항으로 된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로, 다이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히데요시에게서 물려받은 것인 ‘산킨코타이’(參勤交代)로, 다이묘들의 가족을 에도에 인질처럼 머물게 하고 또 각 다이묘들이 많은 경비를 지불하며 연례행사처럼 에도에 공적으로 방문하도록 한 겁니다. 먼저 다이묘를 이렇게 철저하게 통제한 후에 일반인들은 네 계층으로 구분하였고, 각 계층은 그 속에서만 머물며 다른 계층으로의 이동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즉 ‘사농공상’(侍農工商)의 계층구분으로, 초기에는 가장 먼저 나오는 ‘사’는 ‘선비’(士)가 아니라 ‘사무라이’(侍)였지만,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무라이들이 전쟁과 행정에 동시에 관여하면서 ‘선비’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로’로는 250여개의 지역적으로 분리된 다이묘를, ‘세로’로는 사농공상으로 통제되었기 때문에 일본인 개인은 그야말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유일한 탈출구는 자기 계층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주가 거하는 각 성에는 하늘을 찌르는 천수각이 있으며, 그 성 아래에는 사무라이 거주지를 중심으로 배치된 ‘조카마치’구조를 가졌습니다(라프카디오 헌). 즉 모든 생활단위가 무력에 의한 지배가 용이하도록 된 피라밋구조를 가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상소’나 ‘신문고’와 같이 신분을 초월하여 불의를 호소할 수 있는 제도가 일본에는 원초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김용운). 

▲ 다이묘의 가족을 에도에 인질처럼 머물게 하고 다이묘들이 공적 연례행사처럼 에도를 방문하게 한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



3) 형성된 관습/습관과 일본인 상(象) : 
 증명된 외적인 힘에 절대복종하는 습관은 모든 사회적 관습/습관에 뿐 아니라 일본인 상(象)에까지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가미가제 특공대의 머리에 두르는 띠에 쓴 글씨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입니다. 즉 ‘이치’(원리, 理)보다 현재의 ‘법’(法)이 중요하고, 법보다 ‘권력’(權)이 더 중요하며, 권력보다 더 중요한 최상의 가치는 ‘천’(天) 즉 천황이라는 의미로 힘의 피라밋구조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어귀를 한국인이 해방 이후에 썼다가 매우 큰 곤란을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전 세대에는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일본속담들도 일본인의 권력지향적 심성을 잘 나타냅니다 :‘우는 아이와 권력자에게는 도리를 내세우지 말라’, ‘힘센 놈이 옳다’,‘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일본사회를 알기 위해서 이런 가정을 해 보기도 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일본을 지배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은 일본은 소련보다 더 지독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힘에 의한 지배를 세 막부(가마쿠라, 무로마치, 도쿠가와)를 비롯하여 중간의 전국시대와 사실상의 힘의 지배인 메이지유신기를 통해 이루었는데,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외부의 힘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련이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들어왔다면 일본인들은 의례히 ‘긴 것에 감겨라’라는 태도를 따라 그런 소련을 열심히 숭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중에 철저하게 천황 신격운동을 하다가 전쟁이 종료되자 하루아침에 자유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로 탈바꿈하기도 한 것이 일본의 지식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지식인 마루야마 마사오도 그런 쪽에 속한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천황에 대하여 철저하게 숭배하던 모습을 즉각 바꾸어서 일본을 ‘초국가주의’로 분석해내어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그의 탈바꿈 실력은 정상적 일본인의 행태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그야말로 일본에서는 외부에서 온 힘센 자, 즉 새로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새로운 쇼군’이었을 뿐입니다. ‘천황의 명령으로’에서‘쇼군의 명령으로’, 다시 ‘군의 명령으로’에서 마지막으로‘맥아더의 명령으로’모든 것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도쿠가와 시절에도 하지 못한 일본군의 완전무장해제를 매우 쉽게 행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일본에서는 ‘맥아더 신사를 짓자’는 아양을 점령군 최상부층을 향하여 떠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겁니다. 맥아더는 6년의 일본통치를 마치면서 일본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뼈아플 수 있는 [회상록]을 남겼습니다. “한 나라, 한 국민이 1945.8.15 이후의 일본인만큼 철저히 굴복한 일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심지어 일본의 깡패집단인 야쿠자까지 ‘강한 쪽을 돕고 약자를 누른다’는 일본적 전통을 그대로 가질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홍길동과 같은 의적이 약자를 돕고 강자를 괴롭힌다는 조선의 전통은 일본에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대의가 아닌 조직과 나라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하고 의형과 부모까지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사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속에 일본인의 특이한 습관인 ‘천하제일주의’, ‘장인정신’같은 것이 거의 대부분의 계층, 직업마다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이렇게 정치적 탈출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면, 이들의 장인정신은 사실 그리 부러워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또 상호 분리될 수밖에 없는 자연환경을 무력을 통해서 매우 인위적인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기 때문에 외적 제도에 짜맞추어지는 것에 매우 익숙한 일본인 상(象)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기가 되면 천황절대주의라는 절대종교화된 신도를 사용하여 인간을 더욱 몰아부쳐서 개인적, 가족적, 지방적 인간이 아니라 전체일본을 위한 일본인 상(象)을 강제화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이에 복종하는 삶을 78년간 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한 사례로 고대 문학작품에는 잘 우는 일본인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눈물의 강’, ‘눈물바다’, ‘눈물이 소매를 적신다’, ‘소나무 이슬같은 눈물’). 도쿠가와 막부 후기까지만 해도 대기근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산에 올라와 밤새도록 울고 춤을 추면서 해변에서도 울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에도 축제가 끝나고 큰소리로 우는‘고나카리’같은 형식이 쥐꼬리만큼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잘 울지 않고 감정을 억지로 참으며 장례식조차도 형식화되어서 그 어떤 사적 감정도 표출하지 않는 매우 인위적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천황절대주의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적, 가족적 감정의 표출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겁니다. 이것은 거의 예수와 같은 절대종교에서 요구하는 행동의 수준입니다(‘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고’). 그래서 일본 개신교조차도 변질되어 신앙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런 무사적 지배하에 배어진 훈련 때문이었다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 니토베 이나조([일본의 무사도])조차도 말할 정도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5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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